[단독] 與·국민연금, 금융위 공시 초안 제동…"기업가치 평가 불가능"

입력 2026-04-06 14:02
수정 2026-04-06 14:15

기업의 탄소 배출량이나 지배구조 같은 비재무적 성적표를 투자자에게 투명하게 공개하는 ‘지속가능성(ESG) 공시’ 도입을 두고 국민연금이 정부안에 공식 반발했다.

국민연금은 도입 시기를 당장 내년으로 앞당기고, 대상도 연결자산 2조원 이상의 기업까지 넓혀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더불어민주당도 관련 입법안을 내놓고 이달 중 당정협의회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국민연금, 서원주 기금이사 명의로 반발6일 한국경제신문이 단독 입수한 ‘ESG 공시 로드맵 초안에 대한 의견서’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지난달 30일 “국민연금과 같은 장기 투자자의 시각에서는 공시의 신뢰성, 적시성, 그리고 포트폴리오 전반을 포괄하는 데이터의 충분성 측면에서 보완이 필요하다”며 금융위원회와 한국회계기준원 등에 서원주 기금이사 명의로 의견을 전달했다.

금융위가 지난 2월 공개한 ESG 공시 초안에 따르면 2027회계연도(2028년 공시)부터 연결자산총액 30조원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공시를 의무화하고, 기업 가치사슬 전반의 배출량인 스코프 3는 2031년부터 공시하도록 3년의 유예 기간을 부여하기로 돼 있다.

이에 대해 국민연금은 우선 ESG 공시 도입 시기를 2026회계연도(2027년 공시)로 당초 금융위 안보다 1년 앞당기고, 또 공시 의무 대상을 연결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 전체로 넓히라고 명시했다. 스코프3의 유예 기간도 2029년 전후로 의무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ESG 공시 개편, 제대로 된 투자 위해 필요"
국민연금이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지속가능성(ESG) 공시 초안에 반기를 든 건 완화된 공시 의무가 투자자들에게 ESG와 관련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올해 1월 기준 국내 주식에만 약 330조원을 투자하는 최대 기관투자자로서 ESG 정보 접근성 제고를 명분으로 ESG 공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국민연금은 금융위에 당장 내년(2026 회계연도)부터 더 많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은 금융위에 보낸 의견서에서 “ESG 공시를 투자자 중심으로 보완해야 한다”며 “(ESG 공시는) 국민연금이 장기 투자자로서 기업 가치를 제고하고 기금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했다.

국민연금은 “(금융위 로드맵) 대상 기업 58개 중 절반에 가까운 29개가 금융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질적인 산업 전환 리스크가 큰 제조 기업들을 충분히 포함하지 못한다”며 “국민연금이 투자하고 있는 대다수 중대형주를 공시 사각지대에 방치하게 되므로 연결자산 2조원 이상의 모든 코스피 상장사가 포함돼야 한다”고 했다.

국민연금은 금융위 로드맵에서 소규모 종속회사를 공시 대상에서 제외하는 ‘자산·매출액 10% 미만 예외 조항’에 대해서도 수정을 요구했다. 국민연금은 “환경 오염이나 공급망 내 인권 침해와 같은 핵심적인 ESG 이슈가 종종 소규모 해외 자회사나 하위 협력사에서 발생하고 있다”며 “종속회사의 정보가 누락될 경우 기업 가치에 대한 완전한 평가가 불가능해지고 정보의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스코프 3 배출량 공시의 경우 금융위의 유예 기간(3년)을 1~2년으로 단축해 이르면 2029년(2028 회계연도)에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민연금은 “스코프 3 배출량은 기후 관련 전환 리스크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데이터”라며 “스코프 3 데이터가 3년 유예될 경우 국민연금은 지속가능성 공시자료를 2031년 이후에나 사용이 가능해지므로 1~2년으로 단축하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했다.

스코프 3는 기업이 직접 내뿜는 탄소뿐 아니라 원재료 채굴, 물류 운송, 제품 사용, 제품 폐기 등 기업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을 뜻한다. 여기에 공급망에 포함된 협력 업체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까지 대상에 포함된다.

국민연금은 금융위가 ESG 공시를 우선 거래소 공시(자율 공시)로 시작하되 추후 법정 공시로 전환하기로 한 것과 관련해서도 조기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은 “거래소 공시는 공시 위반 시 제재 수위가 낮아 정보의 엄밀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자본시장법에 따른 법정공시는 허위 기재 시 손해배상 책임이나 형사처벌이 수반된다”며 “로드맵 확정 시 법정공시로의 전환 시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시기를 2029년 전후로 앞당기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민주당도 가세..."이달 중 당정"여당은 자산 1조원 이상의 코스피 상장사 전체로 ESG(지속가능성) 공시 의무를 확대하는 입법을 추진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달 중 금융위원회 등과 당정협의회를 통해 최종 의견을 조율한다는 방침이다.

이날 정치권에 따르면 최근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ESG 공시 대상을 연결 자산 1조원 이상 기업까지 대폭 넓히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한국거래소 자율 공시 대신 도입 시점부터 바로 법정 공시로 전환하는 내용도 담았다.

이번 개정안은 2028년(2027 회계연도)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을 시작으로 2029년 2조원, 2030년 1조원 이상으로 ESG 공시 의무 대상을 확대하는 로드맵을 담았다.


금융위안과 도입 시점은 같지만, 의무화 대상 범위가 30조원에서 10조원으로 넓어졌다. ESG 공시의 최종 의무화 대상도 더 많아졌다. 코스피 상장사 대부분을 공시 체계로 묶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다만 박 의원은 연결자산총액 1조원 미만 기업의 공시 적용 시기는 제도 안착 상황을 고려해 시행령에 위임하기로 했다.

특히 이번 법안은 금융위가 제시한 ‘거래소 자율 공시’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시행 첫해부터 ESG 관련 내용을 사업보고서에 수록하도록 했다. 2028년부터 당장 법정 공시로 전환하겠다는 의미다. 거래소 공시는 위반 시 제재가 내부 징계 수준에 그치지만, 사업보고서는 허위 기재 시 과징금이나 형사 처벌이 뒤따르는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대신 ‘세이프 하버(면책 조항)’를 도입해 안전장치를 두었다. 법정 공시 체계에는 넣지만 형사 책임은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또 공시 의무를 부담하는 첫 2개 사업연도에는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과 과징금 부과도 면제받는다. 자산 10조원 이상 대기업은 2027~2028년 장부(2028~2029년 공시)에 대해, 1조원 이상 기업은 2029~2030년 장부(2030~2031년 공시)에 대해 한시적으로 면책 혜택을 받게 된다.

민주당은 이달 중 ESG 공시 도입과 관련해 박 의원안으로 당정협의회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원내관계자는 “개정안이 발의된 만큼 최종안에 대한 조율도 당정에서 함께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공시 대란 우려하는 재계재계는 국민연금의 요구대로 공시 대상이 연결 자산 2조원 이상으로 내년부터 확대될 경우, 코스피 상장사 대다수가 당장 실무적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기준을 적용하면 코스피 상장사 중 약 500개사가 의무화 대상이 된다”며 “당초 예고했던 준비 기간마저 없이 ESG 공시 전선에 투입되는 셈”이라고 했다.

스코프 3 공시를 위한 데이터 확보 방법도 문제다. 기업이 협력사와 하청 기업들에 데이터를 요구해야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상장사 관계자는 “본사가 협력사나 하청 기업에 ESG 데이터를 강제로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전무하다”며 “공급망 전체 데이터를 내놓으라는 것은 우리나라 기업 구조의 현실을 모르는 처사”라고 토로했다.

국민연금이 금융위 정책 로드맵에 공식적으로 반발한 행위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실무진 간에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전달하는 경우는 많아도 직접 서명한 공식 의견서를 보낸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금융위는 의견 수렴을 거쳐 최종안을 확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을 비롯해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반응을 폭넓게 청취하고 있다”며 “투자자와 기업의 이익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이달 중 최종 로드맵을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주연 기자 grumpy_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