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기계, 페인트, 철판 가공 등 전통 제조업에서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가업을 물려받아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양한 주력 사업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 미래 성장을 견인할 신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CEO 레벨에서도 ‘유리 천장’이 깨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래성장동력 찾는 여성 CEO5일 업계에 따르면 오너가 3세인 김현정 SP삼화(옛 삼화페인트) 부사장은 올해 1월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지난해 12월 부친인 김장연 전 회장이 갑자기 별세한 데 따른 인사다. 김 대표는 회사 공동창업자인 고(故) 김복규 회장의 손녀로, 김 회장 별세 후 지분을 물려받아 최대주주(25.8%)가 됐다. 남동생인 김정식 씨는 회사 지분이 없고 경영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김 대표는 회계사와 변호사 자격증을 함께 보유한 경영인으로, 2019년 SP삼화에 합류했다. 글로벌전략지원실장, 경영지원부문장 등을 지내며 해외 사업과 구매, 재경 부문 등의 경험을 두루 쌓았다. 올 1월 대표 취임 직후 사명을 SP삼화로 바꿨다. 회사 관계자는 “기존 사업의 경쟁력은 유지하되 주력 사업이 아니었던 반도체 소재, 태양광 에너지 소재 등 신사업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농기계 업체 TYM도 이달 초 김희용 회장의 외동딸인 김소원 최고전략책임자(CSO)를 CEO로 선임했다. 김 대표는 회사 내에서 홍보, 경영지원, 디지털 전환(DX) 등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았다. 김 대표의 지분율은 4.46%로, 남동생인 김식 부사장(21.99%)과 오빠 김태식 전 부사장(5.81%)에 비해 낮은 수준. 하지만 회사 안팎에선 김 회장이 아들들보다 김 대표의 경영 능력을 더 주목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딸에게도 회사를 키울 기회를 주겠다는 인사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아들 있는데도 딸이 기업 경영업력이 오래된 전통 제조업에서 딸이 가업을 물려받은 사례는 과거에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 남동생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가운데 CEO를 맡는 것은 최근 들어 나타나는 움직임이라는 분석. 오너 3세인 최현수 깨끗한 나라 회장은 2019년 대표를 맡은 후 지난해 12월 회장직에 올랐다. 회사 지분은 7.7%로, 남동생인 최정규 최고운영책임자(COO) 지분(16.12%)에 못 미친다. 업계 관계자는 “누나와 남동생의 나이 차이가 있어 향후 회사 실적을 따져봐야 앞으로 회사 지배구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1979년생)은 최 COO(1991년생)보다 12세 많다.
부친의 뒤를 잇는 여성 기업인은 2010년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다. 1975년 설립된 다이아몬드공구 전문업체 이화다이아몬드공업은 2010년 창업자 김수광 회장의 딸 김재희 대표를 CEO에 앉혔다. 자동차, 건설 분야용 공구 사업을 반도체, 디스플레이, 태양광 등으로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6년 고(故) 양성민 회장의 별세로 조광페인트 최대주주가 된 양성아 대표도 일찌감치 경영에 참여했다. 세 자매 중 막내딸로, 유일하게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창업주 이완근 신성이엔지 회장의 뒤를 이어 2024년부터 단독 대표이사가 된 이지선 대표는 홍보, 재무, 전략기획 등을 두루 거쳤다. 최근 사업영역을 클린룸에서 태양광으로 확장했다. 지난달엔 인공지능(AI) 기반의 제습기 운전제어방법 및 시스템 특허를 취득, 향후 2차전지와 반도체 사업을 확장키로 했다.
민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