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쓰고 보자"…저PBR 딱지 떼려는 '맹탕 공시' 급증

입력 2026-04-01 06:00
수정 2026-04-06 16:07

설립 50여 년 차인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A사는 최근 처음으로 기업가치 제고 공시를 발표했다. 지난해 배당액을 늘려 조세특례제한법상 배당소득 분리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고배당 기업에 해당돼서다. 고배당 기업이 공시를 올리면 분리과세에 따른 절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오는 7월부터 시행되는 ‘저(低)PBR(주가순자산비율) 기업 명단 공개’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A사의 PBR은 0.24배에 그친다.

A사가 기입한 가치 제고 목표는 단 두 줄. 그마저도 ‘수익성 중심의 경영체계 강화’ ‘지속적인 노력을 통한 주주가치 제고 확대’와 같은 원론적인 문구였다. 향후 계획도 ‘원가 경쟁력 강화’ 등 구체성이 떨어지는 내용뿐이었다. 밸류업 공시가 올라온 이후 A사의 주가는 3% 이상 하락했다.

정부의 밸류업 정책 기조에 발맞춰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발표하는 기업이 큰 폭으로 늘어난 가운데 저PBR 꼬리표를 피하거나 절세 혜택만 받을 목적으로 ‘맹탕 공시’를 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주주와의 소통과 자발적 주가 부양이라는 정책 목표에 반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1일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올라온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는 474건에 달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올라온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141건)를 크게 뛰어넘었다. 2년 전(98건)과 비교하면 다섯 배 가까이로 급증했다.

기업가치 제고 공시가 급증한 것은 지난달부터 시행된 배당소득 분리과세 정책 효과가 크다.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차원에서 직전 사업연도 배당성향이 40% 이상이거나, 배당성향이 25% 이상인 동시에 직전 연도 대비 배당금을 10% 이상 늘린 고배당 기업이 정기 주주총회 다음 날까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하면 분리과세 특례를 적용하기로 했다. 배당소득 구간별 세율(14~30%)을 다르게 적용하기 때문에 기존 금융소득종합과세 최고 세율(49.5%)과 비교하면 절세 혜택이 크다.

저PBR 기업 꼬리표를 피하려는 목적도 있다. 금융당국은 업종별 PBR 하위 20% 종목을 공개하는 ‘네이밍 앤드 셰이밍’(공개해 망신 주기)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는데,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발표하면 일정 기간 면제해주기로 했다.

이 같은 이유로 기업 400여 곳이 일제히 밸류업 공시를 올렸지만 기업가치 제고 로드맵은 구체성이 떨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원양어업 업체 B사는 기업가치 제고 목표가 ‘핵심사업 경쟁력 강화’로 단 한 줄이었다. 지난 20일 공시를 발표한 후 이날까지 주가는 5% 가까이 떨어졌다. B사의 PBR은 0.2배에 그친다.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내년부터 약식 공시가 아니라 상세 내용을 기재한 공시를 제출하도록 할 것”이라며 “저PBR 명단 면제를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도 마련 중”이라고 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