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다변화' 수십년째 난제…한국은 왜 '탈중동' 못하나

입력 2026-03-29 22:00
수정 2026-03-30 00:37
‘59.8%(2021년)→71.5%(2024년).’

한국 에너지 수급 구조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수치다. 29일 한국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원유 수입량(10억2800만 배럴) 중 중동산 비중은 69.1%에 달했다. 10년 전인 2016년 86%에 육박하던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이란산 원유 수입을 줄이고 수입처를 다각화하며 한때 59% 수준까지 낮아졌다. 하지만 2022년 우크라이나전쟁으로 러시아산 원유가 제재 대상에 포함되자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2023년과 2024년에는 70%를 넘어섰다. 올해 1~2월에도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70%대였다.

지난 20일 아랍권 매체인 알자지라는 “한국은 자국 내 천연자원이 거의 없어 석유와 가스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중 70% 이상을 중동에서 수입한다”며 “분쟁이 지속된다면 정유소, 전력망, 공장 가동 등 모든 것이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동은 ‘가격’ ‘물량’ ‘거리’ 세 가지 요인이 맞아떨어지는 원유 수입처로 인식돼왔지만, 이번 미국·이란 전쟁을 계기로 ‘디리스킹’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가격·물량·거리…중동 의존 굳힌 3요인한국이 중동산 원유에 의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성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등 주요 산유국은 대규모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장기 계약을 제공해왔다. 정유사에는 가격 변동성을 줄이면서도 필요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최적의 공급처인 셈이다.

중동산 원유는 상대적으로 운송비 등이 낮아 저렴한 편이다. 생산 단가가 낮고, 장기 계약을 통해 가격 조건을 일정 수준 고정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이나 아프리카산 원유는 운송 거리 자체가 길다. 운송 기간도 중동산 원유보다 1주일은 더 잡아야 한다.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기준으로도 중동 대비 수송 비용이 많이 늘어나고, 해상 보험료까지 포함하면 총도입 단가에서 차이가 더 벌어진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꾸준히 지적됐지만,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는 일은 그간 없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그동안 원유 공급이 크게 흔들린 적이 없어 수입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고민이 부족했다”며 “공급 차질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구조를 바꿀 유인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공급망은 점점 고착됐다. 수십 년간 중동산 원유를 중심으로 계약과 물류, 정제 구조가 형성되면서 의존성이 강화됐고 사우디와 UAE에서 들여오는 원유 대부분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지정학적 리스크를 인지하고도 쉽게 바꾸지 못하는 이유다. ◇설비가 발목…“경질유 늘려도 못 쓴다”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유 설비다. 국내 정유사들은 중질·고황 원유 비중이 높은 중동산 원유에 맞춰 설비를 구축해왔다. 값싼 중질유를 들여와 이를 분해해 휘발유·경유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고도화 설비’ 비중이 높다.

미국 셰일오일 등은 경질·저황 원유다. 품질은 좋지만 국내 설비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같은 양을 투입해도 생산 수율이 떨어지고, 정제마진이 낮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한국 정유사의 핵심 수익 구조인 중간유분(경유·항공유) 생산에서는 비효율성이 발생한다.

업계 관계자는 “설비를 바꾸지 않는 이상 원유 도입처 다변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정유산업은 아시아 수출 시장을 겨냥해 고도화 설비 투자를 지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중동산 원유와의 ‘궁합’은 더욱 강화됐다. 결과적으로 설비 구조 자체가 중동 의존을 고착화하는 요인이 됐다. ◇아람코-에쓰오일…자본으로 묶인 공급망중동 의존은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 자본 구조로도 이어져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에쓰오일이다. 한국과 이란 합작회사로 출발한 에쓰오일은 아시아 외환위기를 거치며 1999년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를 최대주주로 맞았다.

이후 에쓰오일은 장기 계약을 통해 안정적으로 아람코산 원유를 도입해왔다. 단순한 구매 관계가 아니라 ‘지분 투자-공급 계약’이 결합한 구조다. 공급 안정성을 높였지만, 수입처 다변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에쓰오일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지난해 기준 90%를 웃돈다. ◇러시아·이란 카드…대안 아닌 또 다른 리스크중동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대안으로 러시아와 미국 등이 거론된다. 미국은 러시아 및 이란산 원유 수입 제재를 한시적으로 풀었고, 달러 외 화폐 결제도 허가했다. 러시아산 원유는 가격 경쟁력이 높다. 실제로 인도와 중국은 할인된 가격에 대량 수입하며 이익을 보고 있다.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끊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재개하려면 먼저 국제결제 등 기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보험과 선박도 확보해야 하지만 쉽지 않다. 미국 외 국가들의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기업의 부담이 크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유럽 시장에서는 러시아산 원유를 정제해 만든 석유제품을 여전히 팔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란산 원유는 기술적으로는 더 매력적이다. 중동산 원유인 만큼 중질유 비중이 높아 국내 정유 설비와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 원유 수입의 주요 공급원이기도 했다. 다만 이란산 원유 역시 제재 대상인 데다 ‘탈중동’ 측면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수입 제재 완화 대상이 이미 선박에 실려 있는 러시아산 및 이란산 원유로 한정됐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수입할 수 있는 양이 많지 않을뿐더러 상당량이 오래된 원유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정유사들이 당장 확보할 수 있는 대체 물량은 미국산이다. 세계 1위 원유 생산국으로 물량이 많은 데다 정유사에 가장 중요한 안정적 공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호주 등 소규모 생산지에서는 추가로 원유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 ◇“탈중동, 수입처 아닌 산업 구조 문제”전문가들은 탈중동이 단순한 수입처 변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공급처 다변화를 위해 미국·아프리카·북해산 원유 도입 확대가 필요하지만, 물류비와 설비 문제를 고려하면 단기간에 전환하기는 어렵다.

대안으로는 정유 설비의 유연성 확보가 꼽힌다. 다양한 원유를 처리할 수 있도록 개질·혼합 능력을 높이고, 원유 특성에 덜 의존하는 방향으로 투자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는 전략 비축유 확대와 함께 비상시 수입 경로 확보를 위한 외교적 협력도 요구된다. 동시에 호르무즈해협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물류 경로 확보도 과제로 꼽힌다.

중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전환이 핵심이다. 수소와 전기 등으로 에너지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원유 의존 자체를 줄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탈중동은 단순히 어디서 원유를 사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유산업과 에너지 구조 전반을 바꿔야 하는 과제”라며 “단기간 대응이 아니라 십수 년 단위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정은/노유정 기자 newyear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