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개교한 서울 신천동 잠실고는 올해 3월 43년 만에 처음으로 여학생을 맞이했다. 지난해 서울교육청으로부터 남녀공학 전환 승인을 받으면서다. 서울교육청 관계자는 “학생 충원의 어려움, 학생의 사회성 발달, 지역 주민의 학교 선택권 보장 등을 이유로 남녀공학 전환을 신청하는 학교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29일 문정복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남녀공학으로 바뀐 중·고교는 2024년 21곳에서 지난해 32곳으로 급증했다. 2020년(6곳) 대비 다섯 배에 달하는 수치다. 서울에서는 2024년 3개, 2025년 7개 학교가 전환했고 올해 들어서는 금호여중과 장충중, 잠실고 등 3개 학교가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전국적인 학생 감소로 여학생이나 남학생만 받아서는 학교를 운영하기 어려워진 것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개교 초기인 1986년 695명이던 잠실고 졸업생은 올해 178명으로 줄었다. 강남 학군지·수녀회 운영 女高도 남녀공학 전환
학생 수 줄어들자 性 '빗장' 푸는 학교서울 용산에 있는 성심여고는 1960년 성심수녀회가 ‘여성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설립한 가톨릭계 여학교다. 여성에게 제대로 된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해 세워진 이화여고 정신여고 배화여고 계성여고 등 전통의 명문 여고와 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 이후 성심여고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교로 이름을 알렸다. 여성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전통 있는 이 여고는 이제 남녀공학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생존’ 위한 남녀공학 전환
29일 교육계에 따르면 성심여고는 학생, 학부모, 학교법인, 동창회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5월 서울교육청에 전환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2027학년도부터 남학생을 함께 모집하는 것이 목표다. 개교 66년 만에 ‘정체성 변신’에 나선 이유는 2023년까지만 해도 155명이던 이 학교 졸업생이 지난해 114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학생이 감소할수록 다양한 교육과정을 편성하기 어려워지고, 학교의 입시 결과와 평판에 영향을 미쳐 지원자가 적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학급이 줄어들면 교육청 지원도 그만큼 감소해 학교 ‘생존’ 문제와도 연결된다. 학교 운영 효율화를 위해 남고와 여고가 통합하는 사례도 생겼다. 경기 수원의 사립고인 동우여고와 동원고는 지난해 통합해 남녀 신입생을 받기 시작했다.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도 남녀공학 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 의사결정 과정에 속도가 붙고 있다. 모집 인원을 채우지 못하는 학교와 근거리 학교를 두고도 성별 때문에 원거리 통학을 해야 하는 주민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다. 서울교육청 관계자는 “잠실고는 지역 내 여고가 없어 여학생 자녀 원거리 통학에 부담을 느낀 지역 주민들이 민원을 낸 사례”라며 “지역 주민의 학교 선택권 보장 등을 함께 고려해 전환을 승인했다”고 설명했다. ◇‘학생 수’ 중시하는 학부모단성학교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과거에는 학부모가 여학교나 남학교에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이성과의 교류가 차단되고 면학 분위기도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잠실고 인근 파크리오 아파트에 거주하는 한 중학생 학부모는 “남·여학교라고 해서 무조건 입시 성적이 좋다는 건 옛말”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에는 학생 수가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며 “이번 남녀공학 전환으로 잠실고 학생이 얼마나 늘어날지가 지역 학부모의 주요 관심사”라고 말했다.
학부모가 학생 수를 따지기 시작한 건 지난해 고교학점제가 본격 도입되면서다.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9등급으로 나뉘던 내신 등급이 5등급제로 변화했고, 이 과정에서 등급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2등급만 받아도 ‘인서울’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지역 내에서 학생이 많은 학교의 인기가 급상승한 배경이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일반고는 입학 정원이 많은 학교일수록 경쟁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학교 입장에서는 학생이 적을수록 지원자가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여고 선호도 낮아져남학교와 여학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나온다. 과거 여성의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대에는 여학교가 필수적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중·여고를 졸업한 직장인 민모씨는 “대학과 회사에서는 절반이 남성인데 여성만 있는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배우다 보니 대인관계에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말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인 만큼 양성평등 의식과 사회성을 기르기에는 남녀공학이 더 적합한 환경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박남기 전 광주교육대 총장은 “남녀공학에서도 반장, 학생회장 등을 여학생이 맡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여성 리더를 길러내기 위해 여학교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가 줄어들고 있다”며 “남녀가 함께하는 사회의 모습과 학교가 비슷하면 사회성을 기르는 데도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