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나프타(납사) 수출 통제에 나섰지만, 실질적인 대체 물량 확보 여부는 불확실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동산 공급 차질이 길어지면서 당장 다음 달은 버틸 수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수급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현재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보유한 나프타 재고는 2~3주 분량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29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23일 나프타를 경제안보 품목으로 지정하고 27일부터 '나프타 수출제한 및 수급 안정을 위한 규정'(고시)을 시행했다. 고시에 따라 원칙적으로 국내 생산·보유 나프타 수출은 금지된다. 수급 불안이 지속될 경우 단순 플라스틱·비닐 품귀를 넘어 전자·자동차 등 전방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수출 통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나프타는 정유사가 원유를 정제해 만들어지는 만큼, 원유 공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으면 생산량 자체가 줄어 수출 제한 효과가 반감된다. 정유사가 생산한 나프타 중 수출 비중은 약 11%에 이른다. 이달 1~25일 수출된 나프타는 약 19만9636톤으로, 전쟁 이전 월평균 국내 소비량(약 400만톤)과 비교하면 수출 금지로 확보할 수 있는 물량은 많지 않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도 가동률을 낮추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LG화학은 23일부터 연산 80만톤 규모의 여수 2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1공장에 재고 물량을 집중했다. 롯데케미칼 여수공장은 정기 보수 작업을 3주 앞당겨 27일부터 실시하고 있다. 여천NCC는 프로필렌 전용 공장 가동을 멈추고 NCC 가동률을 60%까지 내렸다. 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 등 주요 기업들은 고객사에 불가항력 선언 가능성을 이미 통보했다. 업계에서는 4월 중순을 지나면 NCC 가동률이 30~40%대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수출 통제가 임시방편에 그치는 만큼 대체 물량 확보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산 나프타 도입이 가장 주목받고 있다. 미국은 한 달간 러시아산 석유류 제품 제재를 풀었다. 정부는 미국 재무부와 협의해 러시아산 나프타 수입 시 2차 제재가 없고 위안화·루블화·디르함화 등 달러 외 통화로 결제가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이날 KBS 1TV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러시아든 다른 나라든 정부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나프타 물량을 확보하겠다"며 "지금 검토 중이고 일부 협의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 장관은 나프타 가격 상승에 따른 생활물가 우려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쓰레기봉투는 정부가 판매 가격을 정해놔 국민 부담이 적겠지만, 비축유 활용과 사용 분야 우선순위 조정 등을 통해 최대한 가격이 오르지 않도록 촘촘하게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부연했다.
다만 실제 도입까지 걸림돌은 남아있다. 해상에 떠 있는 공해상 물량이 많아 거래업자의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한 달이라는 제재 완화 기한 안에 대금 지급과 입고까지 모든 과정을 끝내기 빠듯해서다. EU의 2차 제재 불확실성도 남아있다. 정유사들이 수입을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다.
KB증권은 수입 가능한 러시아산 나프타 총량을 22만~25만 톤으로 분석했다. 한국의 2~3일 치 수요에 불과해 도입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4월 중순 비축유 방출도 계획하고 있다. 비축유를 정유사가 정제하면 나프타 생산이 가능하다. 정부 비축유는 중질유 비중이 높아 나프타 생산 측면에서 비교적 유리한 성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공정에서도 원유 배합과 증류·후처리 공정 가동 조건을 조정하면 휘발유·경유 수율을 다소 줄이는 대신 나프타 생산량을 늘리는 '스윙 운전'도 가능하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정부는 수출 금지 조치에 이어 대체 수입선 확보에 필요한 운임·조달비 지원, 금융 지원 등을 통해 석유화학 업계를 지원할 계획이다. 이번 중동 사태를 계기로 청와대와 정부는 나프타 비축 체계 구축 검토에도 나섰다. 나프타는 비축 체계 밖에 있다. 현행 제도상 비축 품목은 원유·휘발유·등유·경유·중유·항공유·프로판·부탄으로 한정돼 있다.
과거에도 비축 체계 구축을 위한 제도 개선이 추진된 바 있으나 석유화학 업계의 부담을 이유로 무산됐다. 다만 이번에는 업계에서도 비축 체계 구축을 먼저 요청하고 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6일 한국석유공사 서산 비축기지 간담회에 참석했을 때도 석유화학 업계에서 국가 차원의 나프타 비축 체계 구축을 제안하기도 했다.
박수빈 한경닷컴 기자 waterbe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