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이 위치정보(AIS)를 끈 채 이동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군사적 위협과 통제, 제재를 동시에 피하기 위한 이른바 ‘유령선(다크 플릿)’ 운항이 확산되면서 글로벌 에너지·물류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28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최근 하루 동안 페르시아만을 빠져나간 선박은 단 4척에 그쳤다. 액화석유가스(LPG) 운반선 2척과 벌크선 2척이 이란 라락섬과 케심섬 사이를 지나는 북쪽 항로를 통해 이동했다. 이는 사실상 이란이 승인한 경로를 통해서만 제한적 통행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선박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고위험 해역에 진입한 선박들이 AIS 신호를 끄거나 송출을 지연하면서 실제 운항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일부 선박은 해협을 통과한 뒤에도 수일간 위치 신호를 켜지 않다가 먼 해역에서 뒤늦게 포착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유령선’ 운항은 우선 이란의 해협 통제 강화와 맞물려 있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은 특정 항로만 개방되는 ‘선별 통과’ 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선박의 국적과 화물, 목적지가 공개될 경우 검문이나 억류, 통행 제한 대상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이란 의회는 해협 통과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일부 선박은 위치정보를 끄고 이동함으로써 통제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보험과 법적 리스크도 주요 요인이다. 전쟁 지역을 통과하는 선박에는 전쟁 위험 보험료가 추가로 부과되며, 운항 경로와 위험 구간 진입 여부가 기록으로 남을 경우 보험료 인상이나 보상 제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AIS를 끄면 위험 노출 정도를 정확히 입증하기 어려워져 보험 부담을 줄이거나 책임 추적을 회피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제재 회피 목적도 작지 않다. 이란산 원유는 국제 제재 대상인 만큼 관련 유조선들은 AIS를 끄고 이동하는 방식으로 거래를 이어가고 있다. 3월 들어 하루 평균 약 160만 배럴 규모의 원유가 이러한 유령선형태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협 인근에서는 전자 교란과 위치 신호 조작까지 나타나며 선박 추적 시스템의 신뢰도도 떨어지고 있다. 선박이 의도적으로 신호를 끄는 데 더해, 신호 자체가 왜곡되는 사례까지 발생하면서 실제 물동량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선박 운항은 전쟁 이전 대비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부 국가만 제한적으로 통행을 보장받고 있으며, 전체 공급망은 여전히 위축된 상태다.
전문가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선박이 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리스크”라며 “실제 공급 상황은 시장이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불안정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통제된 수로’로 전환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운송’이 확산되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은 점점 더 예측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