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로앤비즈의 'Law Street' 칼럼은 기업과 개인에게 실용적인 법률 지식을 제공합니다. 전문 변호사들이 조세, 상속, 노동, 공정거래, M&A, 금융 등 다양한 분야의 법률 이슈를 다루며, 주요 판결 분석도 제공합니다.
전통적으로 소송변호사의 방은 소송기록으로 가득합니다. 반면, 필자가 일했던 금융 전문 로펌의 서재 벽면은 두툼한 바이블(Bible)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이블이란 금융계약서류집(Transaction Bible)으로, 기독교의 경전(the Bible)과는 전혀 다른 문서입니다.
이러한 바이블은 주로 대형 프로젝트를 위한 금융계약이 체결되면서 엮입니다. 기본 금융계약서, 채권자간합의서, 부속계약서, 사업서류, 법률의견서 등의 묶음으로 수백 쪽은 기본이고, 수천 쪽을 훌쩍 넘기기도 합니다. 왜 바이블을 만드는 것일까요?대형 프로젝트가 '시장 논리'로 추진되려면?
도로, 연륙교 등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근대 이전에는 이를 동원할 역량을 가진 곳은 국가(왕)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의 도로나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보듯 국가의 재정이나 노역강제를 통해 대규모 시설이 건설되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돈만 있으면 시장에서 기술, 인력, 물적 자원을 매입해 프로젝트를 진행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다만, 도로 건설 후 어떻게 안정적으로 수익을 실현하고, 막대한 건설자금을 마련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습니다.
놀랍게도 1860년경 카를 마르크스는 "왜 도로 건설은 개별자들(개별 자본가들)의 사적 사업이 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고도화에 상응하는 집중된 대규모 자본, 대규모 교류로 인한 도로의 유용성(사용가치), 도로의 현금화(교환가치) 등이 충족되면, 도로 건설도 사적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답하였습니다.
그 조건들이 충족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에서는 140년이 지난 2000년경부터 도로 건설 등의 대규모 프로젝트가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해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대규모 금융투자는 어떤 환경에서 이뤄지는가한국에 앞서 타국의 사례를 먼저 들겠습니다. 모 기업이 확보한 해외자원이 ‘그림의 떡’이 된 사안을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떡'을 입에 넣기 위해서는 현지에 도로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막대한 건설자금이 필요했고, 그 조달을 위해 대규모 금융투자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정치, 금융 법제가 불투명해 어떤 거래구조와 경로로도 금융투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금융투자에 따르는 고도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투자자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전제조건은 있습니다.
앞서 보았듯 마르크스는 자본의 운동을 연구하다가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를 충족시킬 수 없는 곳에서 금융거래가 성사될 수 없고,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한 대규모 프로젝트도 진행될 수 없습니다. 대체로 후진국으로 불리는 곳의 사정이 그러할 것입니다.
최소한 1997년 외환위기 극복 이후의 한국은 그와는 정반대로 되었습니다. 당시 IMF의 프로그램에 따라 자본자유화가 '빅뱅'식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외국인 투자지분 한도가 사실상 철폐되었고 자본시장, 부동산시장까지 외국인에 완전히 개방되었습니다. 또 외국인의 투자 자유와 투자금 회수의 안전이 국가, 법제도 차원에서 보장되었습니다.
그러자 2000년경부터 호주계 투자은행인 맥쿼리의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한국 내 대형 M&A, 프로젝트에 투자되었습니다. 전국 곳곳의 도로, 교량, 지하철 사업 등에서 맥쿼리가 투자하지 않은 곳을 헤아리는 편이 더 빨랐을 것입니다.
국내 금융기관과 전문투자자들은 후순위투자에 공동참여하거나 이를 벤치마킹해 대형 프로젝트 투자에 뛰어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금융 로펌 서재의 벽면이 바이블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금융투자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도구그런데 시장자유주의를 보장하는 정치와 법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우호적 환경을 기초로 투자자의 권익을 직접 보장하는 가시화된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 도구란 다름 아닌 금융계약서입니다.
투자자의 성향과 요구를 충족시킬 금융기법을 선택해 프로젝트의 사업구조에 상응하는 금융거래구조를 설계하고,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대응한 세부 계약 규정이 금융계약서에 잘 반영되었다고 판단될 때, 투자자는 그 계약서에 서명하고 그에 근거해 투자실행을 합니다.
달리 말해, 금융계약이 준수되고, 계약위반 시 제재 조항이 작동되며, 담보실행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할 것이라는 투자자의 '믿음'을 실현할 직접적 준거는 금융계약서입니다.
이때 금융변호사는 법률의견서를 발급합니다. 여기에는 금융계약이 유효하고, 담보실행이 가능하다는 점 등이 명기됩니다. 즉, 금융변호사는 의견서를 통해 투자자의 믿음이 정당함을 승인합니다. 이 의견서는 금융투자실행의 선행조건으로 이것 없이 금융투자는 실행될 수 없습니다.변호사가 고대 무당의 기능을 한다?프로젝트를 위한 금융계약은 창안된 인격(juridical person)인 SPV(투자목적기구)를 중심으로 수많은 개념과 기법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구성물입니다. 그것도, 사피엔스 20만년의 역사에 비추어 찰나인 100년도 안 된 낯선 창안물입니다. 그런데 금융투자자는 이 종이 서류에 준거해 수조 원에 이르는 금액을 투자합니다. 이를 격려하듯 비밀준수협약, MOU, 실사, 주요 조건서(term sheet) 교환, 서명식, 바이블 제공, 선행조건 충족, 인출 등의 의식들(rituals)이 숨 가쁘게 진행됩니다.
다시 한번 놀랍게도,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변호사를 고대 무당(shamans)에 견줍니다. 사람들이 회사, 권리와 같은 상상된 실재(imagined realities)를 믿도록 법률 언어와 의식(rituals)을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화하면, 변호사가 발급하는 법률의견서는 무당의 부적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지요.
성경(The Bible)은 신과 인간의 계약을 담은 증거(testament)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Testament'라 칭하나 봅니다. 계약은 믿음과 불가분으로, 이를 지배하는 원칙이 신의칙입니다. 금융계약의 증거인 바이블 역시 믿음의 체계임이 확인됩니다. 전혀 다른 방향의 가치를 담고 있지만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두 개의 문서에서 모종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금융변호사의 재미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