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반이었던 20년 전, 처음 루브르에 갔다. 디자인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떠난 유럽 여행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모나리자는 생각보다 작다는 생각이 들었고, 밀로의 비너스는 입시 때 그리던 석고상을 떠올리게 했다. 대부분의 유명 작품들은 책으로 보던 것과 비슷했다. 그 거대한 공간을 다소 의무적으로 걷던 중, 이름도 모르던 어떤 조각상 앞에서 멈춰서게 됐다.
‘마치 조각상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수사는 익히 들어왔지만, 그 말을 실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조각상은 안토니오 카노바의 <에로스와 프시케>였다. 아름다운 조형을 넘어선, 실제로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어떤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신비로움의 이유를, 빛을 설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나서 한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예술이 붙잡으려 했던 '생기'의 정체카노바는 까라라 대리석이 가진 투명함을 알고 있었다. 그 새하얀 대리석은 보통의 돌과 달리 빛을 표면에서 완전히 튕겨내지 않는다. 이 투명함은 빛의 일부를 머금었다가 다시 내보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옅게 빛나는 듯한 모습을 만든다. 특히 얇게 가공하면 빛이 투과하기까지 하는데, 따로 세공해 붙여야 할 만큼 얇게 만들어진 에로스의 날개에는 건너편의 창에서 들어온 빛이 은은하게 어린다. 살아 있는 피부가 빛을 마주할 때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이 조각 위에서 재현된다. 그래서 우리는 차가운 조각상에서 따뜻한 생기를 느끼게 된다.
작품에 생기를 담으려는 이 같은 분투는 카노바와 같은 조각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유화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화가들은 이전의 기법들로는 어려웠던 피부의 투명함을 재현할 수 있었다. 투명도 높은 여러 색의 물감을 층층이 겹쳐 올리는 글레이징 기법을 통해, 빛이 캔버스 깊숙이 스며들었다가 다시 산란되어 나오게 함으로써 사람의 안색이 가진 그 미묘한 깊이감을 처음으로 화면 위에 구현한 것이다. 살아있는 투명함을 붙잡으려는 예술가들의 시도는 수백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셈이다. 봄, 신록이 건네는 찬란한 청춘의 빛
“살아있는 것은 투명하다.”
봄이 오면 나는 매년 이 문장을 다시 실감한다. 지구라는 시계가 따뜻한 빛의 태엽을 감아 꽃을 피우고 새잎이 돋아나도록 만들면, 사람들은 그 신호에 이끌려 너도나도 거리로 나와 봄을 즐긴다. 화사한 벚꽃의 계절도 좋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바로 연둣빛 새잎이 돋아나며 빛의 생기로 가득 채워지는 아름다운 신록(新綠)의 시간이다.
이양하는 수필 <신록예찬>에서 이 어린잎의 시기를 청춘이라 불렀다. 초록에도 일생이 있어, 어린잎의 신록을 유년이라 한다면 무더운 여름 울창한 나무의 잎은 장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 가운데서도 신록의 시기야말로 가장 찬란한 청춘의 시대라 일컫고, 이를 예찬한다.
신록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히 색이 고와서만이 아니다. 봄의 어린잎은 얇고 수분이 많아서 빛을 반사하기보다 통과시킨다. 봄날의 햇빛이 잎의 조직 안을 여행하며 뒷면까지 밝혀주는 것이다. 그래서 봄의 나무는 앞에서도 뒤에서도 빛난다. 바람에 흔들릴 때면 수백 수천개의 잎사귀가 각기 다른 각도로 받은 빛을 서로 주고받으며 주변으로 흩뿌린다. 불과 몇 주만 지나면 잎은 두꺼워지고 투과하는 빛이 줄어 짙은 청록의 나무가 될 것이다. 그 생기 넘치는 투명한 봄의 나무는 정말 짧고 아름답게 우리의 시간을 스쳐간다. 마치 우리의 청춘이 그러하듯 말이다.
우리 곁의 투명함들이 건네는 온기조금 더 돌아보면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이런 나름의 투명함을 가지고 있다. 나비의 날개와 풀벌레의 몸짓, 가지 끝에 맺힌 빨간 열매, 그리고 마주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까지 거기엔 ‘투명함’이 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매일 수많은 얼굴을 마주하며 피부 아래 흐르는 그 따뜻하고 붉은 기운으로 상대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스마트폰 손전등을 손가락으로 막아보면 빛이 살점을 가볍게 뚫고 지나가며 붉은 혈색을 비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생기의 실체다. 피부를 흉내 낸 로봇이나 3D 그래픽 앞에서 느끼는 묘한 불편함은 바로 이 투명함 뒤에 있어야 할 생기가 없기 때문이다.
창으로 들어온 빛을 부드럽게 산란시키는 쉬폰 커튼, 창가에 둔 식물, 투명한 유리 화병, 패브릭 소재의 조명 같은 것들은 단순히 모양이 예뻐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들의 투명함을 닮았기에 공간에 생기를 더한다. 빛을 막지 않고 안으로 받아들여 부드럽게 내보내는 그 성질이 공간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 온기와 안도감을 전달하는 것이다.
봄이다. 아직 투명한 이 계절이 지나가기 전에 많은 사람이 조금 더 자주 고개를 들어 이 땅 위의 빛들을 누리기를 바란다. 잎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가장 아름답고 짧은 장면 속에, 살아있음의 가장 밝은 증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