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상큼한 피아노와 투명한 오케스트라

입력 2026-03-27 11:46
수정 2026-03-27 11:47
지난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만면에 미소를 띠고 수석지휘자 사카리 오라모가 등장했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했다.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 서곡’. 따스함을 깃들인 저음현이 강한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그림자 같은 비감이 스칠 때도 온기를 잃지 않았다. 일렁이는 첼로군에 표정이 뚜렷했다. 플루트를 위시한 목관악기의 밀도 있는 연주도 돋보였다. 총주는 쾌적하면서도 구김이 없었다.



오라모의 지휘는 부드럽고 민첩했다. 흐름을 끊지 않고 정중동의 움직임을 독려했다. 고요한 가운데 클라리넷의 노래는 오라모의 장기 중 하나였다. 피사체만 선명하게 하고 배경을 흐리게 하는 사진의 ‘아웃포커싱’ 기법처럼 주위 음을 소거한 듯한 미장센이었다. 숱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들이 스코틀랜드의 헤브리디스 제도를 짙은 유화 같이 그려왔다. BBC 심포니의 연주는 일사불란한 현악군의 케미스트리 속에서 그려낸 파스텔 톤의 수채화처럼 담백한 풍경화였다.

손열음이 협연한 브리튼 피아노 협주곡은 상큼했다. 반짝이는 피아노 음을 활기차게 흩뿌렸다. BBC 심포니는 밝은 색채의 목관과 금관으로 보조를 맞췄다. 종종걸음으로 달음박질치는 피아노를 감싸며 오케스트라가 음을 발산했다. 악센트를 꾹꾹 밟는 꽉 찬 양감의 관현악이 기대감을 더해줬다. 손열음의 열 손가락은 리드미컬하게 엇갈리며 건반 위를 뛰놀았다. 1악장 중반 이후 카덴차에서 손열음은 귓가를 간질이듯 섬세한 연주를 선보였다. 페달을 많이 쓰며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음향을 만들었다. 첼로의 피치카토, 정처 없이 방황하는 피아노에 플루트와 하프, 현의 트레몰로가 어우러졌다. 활기를 되찾은 1악장 말미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손에 잡힐 듯 확실한 피날레를 들려줬다.



2악장에서는 공허한 타악기의 공간감 속에서 팽팽한 리듬의 피아노가 광기를 띠었다. 담담하다가도 비르투오시티(기교)가 번뜩였고, 관악기와 어우러지다가 시치미를 뚝 떼듯 아스라이 멀어지기도 했다. 3악장에서 신비롭고 기이하게 반짝이던 피아노는 점차 기교를 더하며 비극성을 띤 채 고조됐다. 손열음이 보여준 집중력에 수많은 청중의 시선은 곡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러던 3악장은 봄날의 꿈처럼, 꽃이 떨어지듯 끝났다.

4악장은 피아노의 발랄한 기교와 오케스트라의 여유로움이 끝을 향해 행진했다. 고조되는 피아노와 부딪히는 타악기, 다채로운 음색이 노출됐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합이 잘 맞았다. 라이브의 묘미는 형언할 수 없다. 손열음은 이날 관객들에게 브리튼 피아노 협주곡의 새로운 지평을 던져줬다. 커튼콜이 끊이지 않았다. 손열음은 악장, 첼로 수석과 트리오로 쇼스타코비치 5개의 소품 중 1악장 전주곡을 앙코르로 들려줬다. 겉으로는 부드러웠지만 속에 흐르는 긴장과 비장감이 간명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라모와 BBC심포니의 브람스 교향곡 2번은 한마디로 투명했다. 따뜻한 첼로군과 또렷한 목관, 눈부신 바이올린이 분리돼 움직이는 모습이 음악 속에서 잘 보였다. 비올라의 셋잇단음이 잘 들렸고 플루트는 그윽했다. 현과 관이 따스한 봄볕 같았다. 2악장 도입부에서 비올라, 첼로, 베이스의 현악군은 중후하면서도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때로 의뭉스럽고 속을 알 수 없는 브람스 음악의 인간적인 면모였다. 어둑어둑해질 때도 현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격정적인 부분은 숲에서 이는 바람처럼 현과 관에 파동이 느껴졌다.

3악장에서 오라모는 약음을 주의 깊게 내도록 하면서 음악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다소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호른이 어색한 음을 불기도 했다. 오라모는 가장 쾌활한 총주가 나오는 4악장에서 세부가 보이는 연주를 유지했다. 통풍이 잘 됐달까, 힘을 뺀 연주 같기도 했다. 독일적인 중저음이 앞서는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화사하고 투명한 브람스였다. BBC심포니의 앙코르는 버르토크 루마니아 민속춤곡 중 ‘루마니아 폴카’였다. 구성지면서도 현대적인 울림은, 전통을 이어가며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스타일을 말해주고 있었다.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