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70조' 쏟아붓는다…전세계 '패권 전쟁' 벌어진 곳

입력 2026-03-26 19:01
수정 2026-03-27 00:36

국내 반도체 소재 기업 엠케이전자는 지난해 반도체 패키징 공정에서 나오는 폐(廢)솔더볼(납땜용 금속 입자) 재활용 공정과 폐열 회수 시스템 구축에 250억원을 투입했다. 이 중 150억원은 신용보증기금 보증을 통해 저리로 조달했다. 공정 개선으로 연간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 8%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신설된 녹색전환보증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커지는 전환금융 수요
산업 공정을 전기화해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이느냐가 ‘전기국가 패권전쟁’의 핵심 승부처로 떠오른 가운데 공정 개선을 지원하는 이른바 ‘전환금융’ 시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제조업체가 자체적으로 감당하기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많이 들기 때문이다.

26일 블룸버그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녹색채권과 녹색대출 발행 규모는 9470억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 인프라 투자 자금을 조달하려는 수요가 녹색금융 시장으로 몰린 영향이다.

한국도 같은 흐름에 올라탔다. 정부는 2021년 친환경 사업 기준인 한국형 녹색분류체계를 마련한 뒤 이자 비용, 보증 지원 등에 재정을 투입해왔다. 이를 마중물로 민간금융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녹색금융 규모는 2023년 약 57조4000억원에서 지난해 70조3000억원 수준으로 빠르게 늘었다.

특히 재생에너지, 전기차처럼 ‘녹색 여부’가 명확하면 지원 받기가 더 용이하다. GS E&R은 지난해 경북 영덕 풍력발전단지 건설을 위해 600억원 규모의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회사 관계자는 “재생에너지 사업이란 점에서 이차보전 혜택을 받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철강·석유화학·시멘트 같은 소재 산업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들 산업의 탄소 감축 절반가량을 수소와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이 담당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 기술은 비용이 높고 상업성이 검증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기존 녹색금융만으로는 산업 전환을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녹색금융은 ‘이미 친환경인 사업’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전환 과정에 있는 산업은 지원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는 의미다. 글로벌 기후금융 연구기관인 기후정책이니셔티브(CPI)에 따르면 전체 녹색금융 중 소재 부문에 투입된 비중은 2% 수준에 불과했다. ◇‘회색지대’ 소재도 금융 절실주요 선진국은 이미 녹색금융에서 전환금융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핵심은 아직 완전히 친환경은 아니지만, 앞으로 바뀌어야 할 산업의 친환경 전환에 선제적으로 돈을 대자는 것이다. 오형나 경희대 교수는 “소재산업은 온실가스 감축이 시급한 기후 대응의 핵심이자 제조업의 뿌리며, 공급망 안보의 보루”라며 “이 세 가지 가치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선진국은 막대한 전환금융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고 설명했다.

독일 정부는 2021년 9억유로를 들여 청정수소 수입을 전담하는 민관 합작법인 H2글로벌을 설립했다. 비싸게 수입한 수소를 전환 투자가 필요한 소재 기업에 싸게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손실 위험이 줄어들자 은행과 투자자가 수소 생산 설비에 필요한 자금을 대겠다고 나섰다. 이를 바탕으로 한 수소 기업이 2024년 3억9700만유로 규모의 장기 수소 공급 계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철강·석유화학 등 소재 기업은 공정 개선을 위한 수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됐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25억유로 규모의 추가 사업 입찰에 나서며 시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은 한발 더 나아갔다. 2021년 전환금융 기본지침을 마련한 데 이어 2024년 2월 세계 최초로 ‘전환국채’를 발행했다. 5년 만기와 10년 만기 각각 8000억엔 규모로 발행한 국채에 약 5조엔의 자금이 몰렸다. 일본 정부는 이 자금을 소재산업의 공정 전환에 투입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연내 전환금융 도입을 추진 중이다. 그동안은 엠케이전자처럼 감축 효과를 입증해야만 지원이 가능했지만, 제도 도입 이후에는 자금 조달 문턱이 크게 낮아질 전망이다. 우선 녹색분류체계상의 활동 기준만 충족하면 자금을 먼저 지원하고 나머지 까다로운 인증 기준은 5년 내에 사후 보완하도록 하는 유럽연합(EU) 방식을 도입한다. 이와 함께 기준 충족이 어려운 소재 기업 등이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수립한 ‘탄소 감축 전환 계획’의 타당성만으로도 자금을 공급하는 일본식 모델을 병행할 계획이다.

오일영 기후에너지환경부 실장은 “개별 기업이 전환 과정에서 맞닥뜨릴 불확실성, 비용 부담을 정부와 금융회사가 함께 나누는 것이 전환금융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