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감된 범죄자를 상대국에서 내주지 않으면 잡아 올 방법이 없습니다. ‘제2의 박왕열’이 있더라도 당장은 손쓸 수 없는 구조인 거죠.”
‘동남아 3대 마약왕’으로 꼽힌 박왕열이 25일 국내로 송환됐지만 정부 내부에서 이런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이번 송환이 이례적인 ‘톱다운 외교전’이 낳은 결과물일 뿐, 범죄인 인도 조약의 구조적 맹점은 그대로라는 얘기다.
이재명 대통령의 필리핀 국빈 방문과 법무부 실무 협상 끝에 성사된 마약왕의 국내 송환은 의미 있는 사법 공조 성과다. 박왕열은 2022년 필리핀 법원에서 징역 60년을 선고받았지만 감옥 안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마약 유통 사업을 그대로 영위하기도 했다. 필리핀은 범죄인 인도 조약 체결국인데도 이번 송환 전까지 현지 당국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돼 있더라도 상대국 동의를 받아야 하는 ‘상호주의’ 원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대 국가에서 수감된 범죄자를 내주지 않으면 강제로 데려올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캄보디아에 도피 중인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이 이런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수천억원대 배임 혐의로 징역 5년형이 확정된 선 전 회장은 2021년 8월 확정 판결 당일 캄보디아로 도피해 호화 생활을 누리고 있다. 법무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국제형사과 검사들을 파견해 현지 당국을 설득했지만 캄보디아 측은 한국에 체류 중인 자국 반(反)정부 인사와 선 전 회장의 맞교환을 요구하며 송환을 거부했다.
이런 와중에 해외 도피 사범은 매년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신규로 발생한 해외 도피 사범은 2023년 512명에서 지난해 1249명으로 2.4배(143.9%)로 늘었다. 해외 수감자도 1000명을 넘겼다. 김상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외교부에서 받은 ‘해외 우리 국민 수감자 현황’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52개국에 수감된 한국인은 1163명이다. 주로 베트남(162명), 필리핀(41명), 캄보디아(38명)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 집중됐다. 휴대폰 사용과 물품 밀반입이 쉬운 현지 교정시설의 허점을 이용해 범죄 조직을 원격 운영하는 ‘제2의 박왕열’이 언제든 나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법무부는 박왕열 송환을 계기로 “초국가 범죄를 끝까지 추적해 반드시 엄단하겠다”고 강조했다. 사법 정의 실현이 일회성 성과에 그쳐선 안 된다. 이번 송환은 이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응철 법무부 검찰국장이 필리핀을 찾아 정성호 장관의 친서를 전달하며 물밑 작업을 한 끝에 정상회담에서 결실을 맺은 결과다. 사기·배임 범죄자들이 해외 도피를 꿈꾸지 못하도록 사법 시스템 정비와 공조 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