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외이사 역차별 받는 韓 기업

입력 2026-03-25 17:43
수정 2026-03-26 00:09
마이크 스플린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전 최고경영자(CEO)는 요즘 자신의 직업을 ‘사외이사’라고 소개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는 현재 대만 TSMC와 고고로, 일본 키옥시아, 미국 나스닥, 티고에너지 등 5개 기업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세계적 반도체 장비회사 CEO로 10년(2003~2012년) 동안 일한 경험을 높게 산 기업들이 줄 서서 그에게 사외이사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TSMC에는 2015년부터 12년째 사외이사로 이사회에 출석하고 있다. 한국만의 겸직·임기 규제스플린트가 국내에서 활동했다면 ‘사외이사꾼’이란 비아냥을 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분위기는 다르다. ISS 같은 의결권 자문회사가 문제 삼지 않는 특정인의 사외이사 겸직 최대치는 5~6개 자리. 이것도 암묵적인 룰일 뿐 겸직과 근무 연한에 대한 법적 제한은 없다. 다양한 기업에서 장수 사외이사로 활동하는 건 ‘능력의 상징’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명망가를 사외이사로 오래 두는 게 유리하다.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 영입을 통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어서다. 사외이사의 기본 역할은 경영진 견제 및 감시지만, 글로벌 빅테크는 이들의 전문성과 네트워크를 자산으로 삼고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메모리 기업 마이크론이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3월 TSMC 회장을 지낸 마크 리우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베이스다이의 성능 향상을 위해선 TSMC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애플은 사외이사의 85%를 향후 진출이 예상되는 바이오 등 사업 분야의 베테랑으로 채웠다.

한국에서 스플린트 같은 사외이사가 나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일단 겸직이 제한된다. 상법에 따르면 사외이사는 두 곳만 겸직할 수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근무 기한은 최장 6년이다. 이런 규제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한다. 정책지원 못 받는 한국 기업들사외이사 겸직·임기 제한도 다른 규제처럼 그럴듯한 명분을 갖고 탄생했다. 법조인, 교수 출신들이 ‘그들만의 사외이사 리그’를 만들고 자리를 물려주는 행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2019년 정부가 규제에 나서자 경제계는 반대했다. 가뜩이나 사외이사 영입에 어려움을 겪는데 겸직·임기까지 제한하면 누가 오겠냐는 얘기였다.

7년이 지나 경제계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국내 대기업 IR팀장(부사장) A씨는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도 애플처럼 사외이사진을 꾸리고 싶지만 제도가 발목을 잡는다”고 털어놨다. 예컨대 스플린트 같은 명망가가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오려면 5곳 중 4곳의 사외이사를 포기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 특별한 애정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A부사장은 사외이사 영입 직전까지 갔다가 겸직·임기 제한 때문에 없던 일이 되는 게 부지기수라고 토로했다.

글로벌 첨단산업 전쟁에서 한국 기업은 유독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 일본과 달리 대기업엔 직접 보조금을 못 준다고 한다. 멀쩡하게 건설 중인 공장을 지방으로 옮기라는 정치권의 압박도 거세다. 이 와중에 사외이사 영입 경쟁에서까지 ‘모래주머니’를 차야 할까. 상법 개정안의 우선순위는 규제를 추가하는 게 아니라 한국 기업이 받는 차별을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