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익명 예술가’ 뱅크시의 본명이 만천하에 공개되자 미술계 안팎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 사실을 보도한 로이터통신에 “왜 그걸 굳이 밝히느냐”며 원성이 자자하다.
로이터통신은 뱅크시의 실체가 영국 브리스틀 출신의 그래피티 작가 로빈 거닝엄(51)이라고 보도했다. 뱅크시는 전쟁·자본주의·권력을 풍자하는 거리 벽화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래피티 작가다.
작품 한 점이 경매에서 수백억원에 거래되고, 담장에 벽화가 그려지면 해당 집 가격이 급등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본인은 한 번도 공식적으로 정체를 밝힌 적 없이 신비주의를 고수해 왔다.
로이터통신이 그런 뱅크시의 본명을 지난 13일 밝혔다. 기사에는 1년여에 걸친 탐사보도 과정이 함께 소개됐다. 2022년 우크라이나에 뱅크시가 벽화를 남길 때 목격자들의 증언, 우크라이나 출입국 기록, 2000년대 경범죄 기록 등이 근거였다. 뱅크시 측 변호사 마크 스티븐스는 “보도 내용의 상당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면서도 뱅크시의 본명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 미술계 안팎의 비판이 쏟아졌다. 가장 큰 문제는 익명성 훼손이다. 뱅크시 측 관계자는 “익명성은 보복이나 검열 없이 권력에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체가 드러난 이상 앞으로 뱅크시가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같은 민감한 분쟁 지역에서 흥미로운 작업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프렌드레드 펭 런던예술대학 교수는 CNN에 “익명성은 단순한 비공개가 아니라 예술적인 의도가 들어간 선택”이라며 “익명성이 깨진 뒤 작품이 작가의 신상과 묶여서 해석되면 보편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실제로 예술계에서 익명을 고수하는 사례는 종종 있어왔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는 1956년 프랑스 최고 권위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받은 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같은 상을 또 받았다. 책 수백만 부를 판매한 이탈리아 인기 작가 엘레나 페란테 역시 본명이 알려져있지 않다.
“사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 매체 데일리메일은 2008년 이미 거닝엄을 뱅크시로 지목한 바 있다. 이후 미술계에는 거닝엄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뉴욕의 익명 예술가인 저크페이스는 “뱅크시의 정체를 밝힌 건 프로레슬링이 진짜가 아니라고 굳이 알려주는 것처럼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익명성 자체가 작품의 일부인데, 로이터통신이 눈치 없이 이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은 “뱅크시가 문화·미술산업·국제 정치 담론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라 보도했다”고 해명했다. 뱅크시가 공인이기 때문에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 공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대중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로이터통신에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 등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미술계는 뱅크시의 작품 활동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주목하고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