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메켈레와 임윤찬.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두 젊은 음악인이 파리에서 만났다. 지난 12일 필하모니 드 파리에서 파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보였다. 공연 시작 넉 달 전부터 티켓은 매진. 파리 중심가에서 떨어진 18구에 자리함에도 2400석 규모 공연장엔 빈자리가 없었다.
메켈레와 임윤찬은 서로가 익숙한 사이다. 지난해 6월 서울과 2024년 파리·보스턴에서도 만났다. 당시 서울에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파리에선 1번을, 보스턴에선 2번을 각각 연주했다. 악단은 모두 파리 오케스트라로 같았다.
메켈레는 지난해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임윤찬을 “친구”로 부르며 그와 많은 음악적 대화를 나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들은 라흐마니노프 곡들로 채워진 공연에서 그간 맞춰온 호흡을 다시 선보였다.
창대함을 감춘 담백한 시작
1996년생인 메켈레는 젊은 나이에도 음악가들과의 소통에 능한 지휘자다. 20대의 나이에 오슬로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파리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직을 동시에 꿰찼을 뿐 아니라 내년부터 시카고 심포니 음악감독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겸한다.
2004년생인 임윤찬도 자신의 나이대에 단연 최고의 주목을 받는 피아니스트다.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장 큰 무대인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에서 공연한 뒤 지난달 실황 앨범을 내놓는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 공연 첫 곡은 피아노 작품인 전주곡(작품번호 3번) 중 2번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작곡가 헨리 우드가 편곡한 작품이었다. 원체 피아노만으로도 장대함이 돋보였던 곡이었던지라 관현악 편성이 잘 어울렸다. 목관과 금관이 힘을 더하며 끝낸 마무리로 파리 오케스트라와 임윤찬은 파리 필하모닉 홀에 에너지를 가득 불어넣었다. 이어 무대엔 머리를 묶어 올린 임윤찬이 올라왔다. 처음 악단과 지휘자가 등장했을 때보다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시작은 담담했다. 피아니스트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을 시작할 땐 멀리서 다가오는 종소리처럼 건반의 울림을 점점 키워가면서 느릿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임윤찬의 강약 표현은 뚜렷했지만 그렇다고 서정성에 치우친 인상은 아니었다.
그는 악보를 재현하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루바토를 하면서도 리듬감을 살렸다. 몸을 좌우로 살짝 흔들면서 운율감 있게 빚어낸 소리는 담백하면서도 음마다 맛깔이 알찼다. 절제미와 개성 사이에서 피아니스트가 찾아낸 균형미였다.
한 번의 두드림에도 명확한 의미를 담았다
악단과의 호흡도 주목할 만했다. 피아니스트가 민첩하게 연주하고, 악단이 피아노의 음색을 부드럽게 감싸듯이 따라오는 인상이 이어졌다. 여러 성부를 일일이 마주하며 대화하듯 풀어나가는 2악장에선 임윤찬만의 포용력이 빛났다.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 여러 악기와 소리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임윤찬은 악기 저마다의 반응력과 음색에 맞춰 섬세하게 타건을 조절했다. 악기들이 개성을 드러내도록 한 뒤 이를 받아내는 연주였다. 22세란 피아니스트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노련함이 돋보였다.
대미인 3악장에선 금관과 타악기가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 뒤 이를 피아노와 함께 폭발시킨다.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감성적인 선율 전개가 두드러지는 악장이기도 하다. 합을 여러 번 맞춰본 사이답게 임윤찬과 메켈레, 단원들은 컴퓨터로 잰 것처럼 똑 떨어지듯 맞춰 낸 소리를 냈다. 긴장을 쌓아갈 때보다 이를 극적으로 해소할 때 그 호흡이 빛났다. 임윤찬의 감각적인 당김음(싱코페이션)은 음표 하나하나가 악보에 담겨있는 이유를 규명했다.
놀라운 건 속도감을 유지하면서도 음 하나하나를 민첩하고 명료하게 주조하는 임윤찬의 솜씨였다. 발작적으로 건반을 누른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는 힘을 건반에 재빠르면서도, 올곧게 담았다. 연주 마지막까지 예민한 반응성을 유지한 덕분에 피아노에선 연주자의 몸과 건반이 하나가 된 듯한 일체감 있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칼을 단단하면서도 날카롭게 벼리는 대장장이가 매순간 섬세해야하는 유리공예마저 해내는 모습 같았다. 현악기는 층이 두꺼운 소리로 피아노 소리를 받치는 그릇 역할을 했다.
악단과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주가 끝나자 “브라보” 소리가 곳곳에서 터지면서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악장인 사라 넴타누를 비롯한 파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신뢰 가득한 눈빛과 생기 있는 박수로 관객들의 환호에 합류했다. 메켈레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한 임윤찬은 프랑스 작곡가인 벵자맹 고다르의 오페라 <조슬랭>에 쓰인 자장가를 앙코르로 연주했다.
임윤찬이 최근 공연에서 앙코르로 연주하며 팬들에게 여운을 남긴 곡이다. 레가토(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주법)로 자신만의 리듬감을 살리며 만든 운율이 감미로웠다.
공연 2부에선 악단이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연주하며 고조된 분위기를 이어갔다. 춤을 추듯 넘실거리며 프레이징을 풀어내는 메켈레 특유의 해석이 돋보였다. 서정성이 가득한 3악장은 호불호가 갈릴 만했다. 지휘자는 다이내믹을 세밀하게 풀어내기보다는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힘이 살짝 과한 인상이었다. 악장의 연주는 화려했지만 이따금 총주(투티)에 비해 음색이 튀었다.
피날레인 4악장에선 금관악기의 웅장함을 살려 관객의 몰입감을 극대화했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보다는 풍부하고 따뜻한 음색에 가까웠다. 악단은 소리로 된 층을 겹겹이 쌓으며 에너지를 조금씩 끌어올린 뒤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쪽을 택했다. 파리 오케스트라, 메켈레, 그리고 임윤찬의 만남은 11~13일 내내 이어졌다. 11일과 12일의 레퍼토리는 라흐마니노프로 같았다. 13일엔 메켈레가 쇼스타코비치의 현악사중주 8번으로 첼로를 켜고 임윤찬이 스크랴빈 소나타 3·4번을 연주했다.
파리=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