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초 안에 인증·결제 끝…'전기차 충전' 패러다임 바뀐다

입력 2026-03-24 16:05
수정 2026-03-24 16:32

전기차 운전자 김규상 씨(45)는 지난 겨울 지방 출장길 충전기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영하의 날씨에 장갑을 벗고 화면을 터치하며 회원 카드를 댔기만, 통신 오류로 세 번이나 결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충전기 간 호환성을 제공하는 '로밍'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게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는 이런 풍경이 사라질 전망이다. 정부가 충전 커넥터를 꽂기만 하면 사용자 인증부터 결제까지 10초 안에 끝나는 ‘PnC(플러그 앤드 차지)’ 기술 전면 도입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전기차 충전기 앞에서 카드 찾고 앱 켜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커넥터를 꽂는 순간 차량이 스스로 누구인지를 증명하고, 충전과 결제·전력 거래까지 한 번에 처리하는 PnC·V2G(차량-전력망 연계) 시대도 성큼 다가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결제 5단계서 1단계로 "PnC 대중화 원년"기후에너지환경부는 25일 마포 DMC타워에 ‘전기차 PnC 도입 및 보안 인증 표준화를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PnC는 국제 표준인 ISO 15118을 기반으로 차량과 충전기가 고도의 보안 통신을 주고받는 기술이다. 차량 내부에 ‘위조 불가능한 디지털 신분증’인 공개키 기반(PKI) 인증서를 심어, 플러그를 꽂는 순간 차량이 스스로 누구인지 증명하고 결제를 승인한다.

그동안 국내 전기차 충전은 ‘각자도생’이었다. 운전자들은 충전기 사업자마다 다른 카드를 써야 할 때가 많았고, 로밍(결제망 공유) 서비스는 잦은 접속 불량을 일으켰다. 이런 불편이 전기차 사용자에게 ‘페인 포인트’가 돼왔다.

정부는 이번 공청회 결과를 반영해 친환경자동차법 시행령 등에 PnC 지원 충전기의 정의와 기술 기준을 명문화하고, 보조금·품질 인증 제도까지 연동하는 방안을 6월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7월 이후 설치되는 공공·민간 급속 충전기에는 PnC 지원 여부가 평가의 핵심 항목으로 들어가고, 기술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제품은 보조금 지원에서 제외하거나 감액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 단일의 PnC 체계를 구축해 9월 추석 이전까지 전국에서 시범 운영하는 방안도 추진될 전망이다.

정선화 기후부 녹색전환정책관은 “전기차 충전은 이제 단순히 전기를 공급하는 수준을 넘어, 국민이 보다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로 발전해야 할 시점”이라며 “공청회를 통해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PnC 충전 시설 운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세계는 이미 PnC 전쟁 중기존에 전기차 사용자들은 충전을 위해 카드 인식이나 앱 로그인, 충전기 선택, 금액·시간 설정 등 5~6단계를 거쳐야 했다. PnC가 대중화하면 케이블만 연결하면 차량이 자체 내장 신분증(인증서)를 통해 본인 인증과, 충전 및 결제가 끝난다.

세계 시장은 이미 PnC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특히 유럽과 북미는 플랫폼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표준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유럽(EU)은 허브젝트 프로젝트 중심의 PnC 통합 생태계를 구축 중이다. 수만 개의 충전소와 BMW, 벤츠 등 제조사를 연결해 국가 간 로밍 표준화 완료했다. 유럽은 ISO 15118 표준을 기반으로 로밍을 통합 제공하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BMW, 메르세데스-벤츠, 폭스바겐, 포르쉐 등은 신형 전기차에 PnC 기능을 기본 탑재하고 있다.

미국에선 테슬라가 독자 PnC인 ‘슈퍼차저’를 포드, GM 등에 개방하며 사실상 북미 표준(NACS) 장악 중이다. 슈퍼차저 네트워크에서 차량을 연결하면 별도의 카드 없이 계정에 연동된 카드로 자동 결제가 이뤄진다.

단순 UI 구축? 왜 어려웠나PnC는 전기차 사용자 입장에선 편의성 개선을 위한 UI(유저인터페이스)의 변화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도화된 보안과 글로벌 표준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인프라 프로젝트였기에 보급이 쉽지 않았다.

우선 차량 내부에 위·변조가 사실상 불가능한 디지털 인증서를 심고, 이를 발급·관리하는 인증기관?충전 사업자-서비스 사업자까지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각 단계마다 인증서 갱신과 폐기, 해킹 대응 체계까지 제대로 갖추며 사용자 편의성을 높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 표준인 ISO 15118 적용 문제도 난항이다. 자동차는 주요 수출품목이기에 제조사들이 국내·해외 PnC에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이 호환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국내에 이미 깔려 있는 수만 기의 완속·급속 충전기 상당수는 국제 표준화 규약을 지원하지 못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나 충전 모듈 교체를 해야하고, 심하면 충전기 전체 교체가 필요하다.

보안업계에선 '교차 인증(cross-certification)도 숙제'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전력과 완성차, 충전 사업자(CPO), e-모빌리티 서비스 사업자 등의 인증서를 교차로 신뢰가능하도록 묶는 기술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해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누가 인증의 루트가 될 것인가, 정부가 직접 루트를 운영할 것인가 등 업계 간 이해관계 조정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서둘러 국가 표준안을 확정하고 보안 인증 체계를 단일화하려는 이유도 PnC 보급을 서두르되 PnC 국제 표준 전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지금까지 공개된 기후부 로드맵에 따르면 PnC 공급에 가장 강력한 드라이브는 7월부터 집행되는 2026년도 신규 충전소 보조금 사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PnC를 지원하는 차량과 충전기에는 대당 약 10만 원 내외의 추가 인센티브를 제공하되, 통신 규약이 미달하는 노후 제품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대폭 감액할 방침이다.

변화는 완속보다 급속 충전소에서 시작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의 ‘E-pit’ 등 민간 급속 충전 사업자들이 2026년 하반기까지 전국 1500개 이상의 거점 충전소에 PnC를 우선 적용한다. 아파트 등 완속 충전기는 교체 주기가 길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2026년 이후 신축되는 건물에는 PnC 규격 설치가 사실상 의무화될 전것으로 보인다.
단순 결제 그 이상 'V2G' 에너지 관리로전력 전문가들은 PnC 도입이 ‘편의성’ 그 이상의 산업적 가치를 지닌다고 분석한다. PnC를 통해 차량과 전력망이 신뢰 기반으로 개통되면 전기차 배터리의 전력을 건물이나 전력망에 되파는 양방향 충방전(V2G, Vehicle to Grid) 서비스가 가능해져서다. 차량이 충전기에 꽂혀 있는 동안 실시간 배터리 상태(SoC) 데이터를 연동하고, 전력 피크 타임에는 전기를 내보내 ‘움직이는 ESS(에너지저장장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즉, 운전자의 전기차 충전 행위 자체가 ‘에너지 거래’로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차량이 충전기에 꽂혀 있는 동안 PnC를 통해 차량이 확실하게 신원 인증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의 배터리에서, 어느 정도의 전력을, 어떤 가격에' 가져왔는지 정산이 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차량 한 대 한 대가 계통에 참여하는 '소형 발전소'가 되는 구조다.

가령 PnC 연결과 동시에 차량은 "현재 내 배터리는 80%이고, 내일 오전 11시까지 90%는 필요해. 그전까지 남는 전력은 전력망에 빌려줄게"라는 정교한 협상도 가능해진다.

이미 해외에서는 이미 가정용 ESS를 묶어 하나의 거대한 발전소처럼 운영하는 VPP(Virtual Power Plant) 모델이 가동되고 있다. 테슬라의 텍사스·캘리포니아 VPP가 대표적 사례다. 테슬라는 가정용 ESS인 '파워월(Powerwall)' 사용자를 모아 전력 피크 시 전기를 방전하게 하고, 참여자에게 보상을 주는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최근에는 이를 전기차(EV)로 확장하고 있다.

가능성은 무궁무진 하다. 2030년까지 국내 전기차 보급 목표와 배터리 용량을 보면, 총 420만 대에서 약 294~330GWh(평균 70~80kWh 기준)의 배터리가 공급된다. 약 40~50GW 수준의 순간 동시 방전이 가능하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국내 전기차의 20%만 V2G에 참여해도 여름철 전력 피크 시 수조 원이 드는 추가 발전소 건설 없이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할 수 있는 셈이다.

만일 전기차 보급이 가속화돼 '1000만 대 시대'가 열리면 국내 전역에 700GWh급 분산형 ESS가 깔리는 셈이고, 이는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ESS 단지보다 수천 배 큰 규모가 된다. 한 정부의 관계자는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고 PnC와 V2G가 결합되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해결하고, 서비스재난 상황이나 오지에서 전기차가 건물의 비상 전력을 공급하는 복지 모델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