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희 사무총장 "시조는 韓문화의 큰 보물…美도 글쓰기 교육에 활용"

입력 2026-03-23 18:12
수정 2026-03-24 00:12
미국의 한 중학교 수업. 시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면 교실은 금세 조용해진다. 첫 문장조차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국 전통시인 시조 창작을 과제로 내주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형식에 맞는 단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창작의 고통’이 적다. 자유시는 한 줄도 못 쓰던 학생이 시조는 몇 편씩 써서 낸다는 게 박종희 세종문화회 사무총장(75·사진)의 설명이다.

미국 일리노이대 의대 교수로 일하고 있는 박 사무총장은 최근 방한해 만난 기자에게 “미국에서 한국 문학 시조가 글쓰기 교육 도구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며 “한 해 시조 경연대회에 작품을 내는 학생과 일반인은 600명을 넘는다”고 전했다. 시조가 ‘외워야 할 문학’으로 취급되는 한국과 사정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박 사무총장을 비롯한 시카고 교민이 2004년 비영리단체 세종문화회를 설립하고 20여 년간 현지에서 시조 확산에 힘을 쏟은 결과다.

박 사무총장이 시조에 처음 주목한 것은 2000년대 초반 무렵이다. 당시에는 한국 문화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박 사무총장은 “번역된 문학을 읽히는 것보다 직접 써보게 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며 “서구 교육 환경에 접목할 수 있는 형식으로 시조를 선택했다”고 했다.

세종문화회는 시조 확산을 위해 교사 교육에 집중했다. 연간 200~300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시조를 수업에 도입하면 파급력이 크다고 봤다. 세종문화회는 교사 워크숍과 강의 영상, 수업 자료를 꾸준히 보급했다. 일부 지역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했고, 국제 시조 경연대회에 50여 개국 출신 참가자들이 몰렸다. 영어뿐 아니라 힌디어·러시아어·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쓴 시조도 등장했다. 최근 대회에 90세가 넘는 참가자 두 명이 작품을 제출하기도 했다. 박 사무총장은 “시조는 노년층의 인지 활동과 창작 욕구를 자극하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귀띔했다.

정작 한국에선 그 열기가 뜨뜻미지근하다는 평가다. 주로 고시조 해석과 암기에 치우치다보니 직접 쓰고 즐기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정 부족에 따른 아쉬움도 있다. 세종문화회는 여전히 민간 후원과 미국 내 지원에만 의존하고 있다. 일본 전통시 하이쿠가 전폭적인 공공 지원으로 세계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세종문화회는 시조의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매년 2월 7일을 ‘세계 시조의 날’로 지정해 기념 행사를 열고 있다. 고려시대 시인 우탁의 기일에서 유래한 날짜다. 올해 행사에서는 영어와 한국어뿐 아니라 여러 언어로 창작된 시조가 낭송됐다.

박 사무총장은 서울의대 동문회상을 받기 위해 방한했다. 소아 알레르기·천식 분야에서 임상과 교육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 한국 음악과 문학을 알리는 데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았다. 박 사무총장은 “시조는 한국 문화의 가장 큰 ‘보물’”이라며 “한국 교육 현장에서도 시조가 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창작 수단으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