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정몽구 회고록

입력 2026-03-23 07:00

1940년 5월 16일 프랑스 파리. 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프랑스로 달려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독일군을 막을 예비부대는 어디 있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전혀 없다(Aucune)”는 말만 되풀이했다. 소득 없이 정부청사를 빠져나오던 처칠의 눈에 띈 것은 백발의 공무원들이 힘없이 정부 문서를 소각하는 모습이었다. 처칠이 남긴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는 최고책임자만이 알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시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이 쓴 회고록은 ‘역사적 순간’을 당사자의 시선에서 담은 귀중한 사료(史料)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부터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백악관 시절>까지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

국내에선 <백범일지>(김구 임시정부 주석), <호암자전>(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와 같은 자전 기록이 후대 정치인과 기업인에게 분발의 ‘원천’이 되곤 했다. “나는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는 정주영 회장의 회고록 한 구절은 독자에게 진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내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정몽구 명예회장의 생애와 경영 철학을 집대성한 회고록 발간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정 명예회장은 ‘품질경영’으로 현대차그룹이 도요타, 폭스바겐과 함께 글로벌 자동차 ‘빅3’로 도약하는 데 반석을 놓은 인물이다. 미국 시장에서 ‘10년·10만 마일 무상 보증 수리’라는 파격적인 승부수로 ‘싸구려’라는 세간의 인식을 단숨에 뒤집었다. 외환위기, 미국 앨라배마 공장 준공 등 기로마다 단순하지만 묵직한 메시지로 나아갈 방향을 잡았다.

지난해 세계 신차 판매에서 BYD 등 중국 업체가 일본 기업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시장이 급변하고 있다. 차체 곳곳에 분필로 동그라미를 치고 “여기 표시한 부분, 모두 다시 고쳐봐”라고 추상같이 지시하던 정 명예회장의 목소리가 담긴 회고록이 새롭게 밀려오는 충격을 극복하는 데도 큰 힘이 되길 바란다.

김동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