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우리가 하려고 하는 행동,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 중에 선의(善意)라는 것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bona fides’라고 쓰고, 이 어휘에서 파생된 영어는 ‘good faith’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fides’라는 라틴어는 믿음, 신뢰라는 뜻과 함께 현(絃)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찰현악기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피들(fiddle)의 어원이 바로 이 ‘fides’입니다. 믿음과 현악기. 얼핏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개념이 하나의 단어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언어는 때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의 깊은 연결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법을 공부한 사람들은 ‘bona fides’라고 하면 수사기관의 수사절차가 규정에 어긋나더라도 합리화될 수 있다는, 미국연방대법원이 판례로 정립한 법리가 떠오를 겁니다. 위법성이 사라져 버리는 힘을 가진 선의. 법의 세계에서 선의는 단순한 감정이나 태도가 아니라 절차의 하자를 덮고 위법의 그림자를 지우는 현실의 힘입니다. 그렇기에 선의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무겁습니다. 이 단어가 어떤 느낌을 주나요. 그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fides’가 현악기의 어원이라는 것을 알고 믿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나온 악기가 무엇일까요. 사람 목소리가 최초의 악기라고 한다면 그다음에 나온 악기는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타악기라고 말합니다. 땅을 구르고, 돌을 두드리고, 가슴을 치는 행위에서 리듬이 시작됐다고. 또 다른 이들은 활시위가 퉁겨지는 순간, 사냥의 도구에서 음악이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 하나. 그것이 진동할 때 소리가 나고, 그 소리를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악기가 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현악기라는 뜻도 가진 데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바이올린이었습니다. 바이올린. 오케스트라의 악장, 제1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는 무대에 나와 항상 제1바이올리니스트와 악수를 합니다. 단순한 의례처럼 보이지만, 그 악수에는 오늘 이 연주를 함께 이끌어 가자는 무언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지휘자가 단원들을 믿지 못하면 연주가 불가능하겠지요. 반대로 단원들이 지휘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100명의 연주자가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오케스트라는 어쩌면 인간의 협력과 신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운 형태인지도 모릅니다.
믿음, 현악기. 아, 도무지 이런 것들이 모두 연결되는 알고리즘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맞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이란 원래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니까요. 선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밤 현악기의 선율을 들으며 믿음을, 인간의 선의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현의 울림이 공간을 채울 때 우리는 잠시 법도, 논리도 내려놓고 그저 느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 순간을, 내가 누군가를 온전히 믿었던 기억을. 우리가 좋아하는, 우리가 하려고 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현악기의 선율이 선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선율이 오늘 밤 당신의 마음에서도 조용히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