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 합쳐서 연봉이 2억원이 넘어요. 아직 젊고 대출받을 능력도 되니까 대출을 상환할 자신도 있죠.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대출 규제 때문에 저희가 서울에서 살 수 있는 집이 없더라고요."
대기업에 다니며 맞벌이를 하는 한 30대 회사원 박모 씨의 한탄입니다. 소위 '고소득 맞벌이'에 속하는 이들은 최근 주변 동료가 하나둘 집을 사기 시작하자 마음이 급해져 부동산 문을 두드렸습니다. 모아둔 현금 6억원에 대출을 얹어 업무지구 접근성이 좋은 곳에 20평대(전용면적 59·60㎡) 집을 알아봤지만 이미 눈여겨본 단지들은 호가가 16억~18억원으로 높아진 상태였습니다. 정부의 촘촘한 대출 규제 앞에서는 박 씨 부부의 높은 소득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눈높이를 낮춰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권에서 집을 구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울 부동산 시장 거래가 '특정 가격대'로 쏠리고 있습니다. 박씨 부부와 같은 실수요자가 대출 6억원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15억원 이하'가 기준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올해 서울 아파트 거래 10곳 중 8곳 '15억 이하' 23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9일 기준 올해 서울 아파트 거래량은 1만1988건으로 집계됐는데, 이 중 15억원 이하 아파트 거래 비중이 81.14%에 달했습니다. 올해 들어 서울에서 팔린 아파트 10채 중 8채가 15억원을 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불과 1년 전과 비교하면 상당한 변화입니다. 지난해 1~2월에는 서울 아파트 거래(1만407건) 중 15억원 이하 거래(7158건) 비중이 68.78%였습니다. 1년 만에 중저가 거래 비중이 12.36%포인트 급등한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서울 아파트값이 가파르게 올랐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격이 올랐음에도 거래는 오히려 '중저가'에 쏠리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시작된 '대출 규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정부 출범 직후 시행된 6·27 대책으로 대출 한도를 6억원으로 제한한 데 이어, 10·15 대책을 발표해 15억원 초과 주택은 4억원, 25억원 초과 주택은 2억원으로 대출 한도를 축소한 바 있습니다. 결국 살고 싶은 곳보다 대출 규제를 피할 수 있는 집으로 수요가 몰리는 '생존형 매수'가 시장의 주류가 됐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수요가 15억원 이하 아파트로만 쏠리면서, 15억원 초과 아파트가 밀집한 상급지 시장은 활력을 잃고 가격이 내림세로 돌아섰습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시장을 이끌던 강남 3구와 용산구 집값은 3월 셋째 주(16일 기준)에 4주 연속 하락세를 기록했습니다. 송파구(-0.16%), 서초구(-0.15%), 강남구(-0.13%), 용산구(-0.08%) 순이었습니다.
'한강벨트'로 불리는 선호 지역들도 속속 하락 전환했습니다. 강동구(-0.02%)와 성동구(-0.01%), 동작구(-0.01%) 등이 하락했습니다. '6억원' 대출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가격 마지노선(15억원)을 넘어서는 순간, 매수세가 뚝 끊기는 칸막이 효과가 확연해진 것입니다."결국 현금부자에게 기회"…'20평대'로 수요 쏠려문제는 이런 상급지 부동산 시장에서 '급매'가 쏟아진다고 하더라도, '현금 부자'가 아닌 이들은 쳐다도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박 씨 부부처럼 대출을 활용해 '내 집 마련'의 첫 단추를 끼우려던 이들은 불만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현장에서는 이런 현상이 소형 면적 선호와 '가격 붙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5억원 칸막이를 피하기 위해 30평대 대신 20평대를 찾는 수요가 많아지면서, 곳곳에서 20평대 가격이 30평대 가격을 턱밑까지 추격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중입니다.
서울 마포구의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최근 손님 10명 중 7~8명은 대출 규제 때문에 15억원 밑으로만 집을 찾는다"며 "그러다 보니 입지 좋은 단지의 20평대 가격이 30평대와 불과 1억~2억 원밖에 차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붙어버렸다. 30평대는 거래가 거의 안 되는데 20평대만 불이 붙은 상황"이라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부동산 거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출을 동원해 이뤄지기 때문에 대출 규제는 부동산 거래에 치명적인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무엇보다 우려되는 부분은 똑같이 높은 소득을 올려도 '자산을 물려받은 그룹'은 상급지로 향하고, 그렇지 못한 그룹은 대출의 벽 앞에서 외곽으로 밀려난다는 점"이라며 "부모의 조력 여부에 따라 생애 첫 주택의 시작점이 완전히 갈리는 양극화가 고착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