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더 확장하는 K-컬처…더 강해지는 소프트파워

입력 2026-03-23 09:01
수정 2026-03-24 15:05

지난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방탄소년단(BTS)의 공연은 군 복무로 흩어졌던 K-팝 스타가 돌아왔다는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전 세계 190개국에 생중계되면서 서울의 문화적 위상과 도시 브랜드 가치를 한 단계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펼쳐진 무대는 서울이 전통과 현대, 대중문화와 세계성을 아우르는 도시임을 각인시켰죠. 앞서 골든글로브상과 그래미상을 휩쓴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영예의 아카데미상 2관왕에 오르는 쾌거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중동에선 미사일이 날아다니고, 우크라이나에선 총성이 아직 멎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의 관세전쟁은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하드파워(hard power) 대결이 어느 때보다 뜨거운 시기에 K-컬처는 지구촌의 갈등을 집어삼키는 용광로가 되고 있습니다. 소프트파워(soft power)야말로 세계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끄는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인공지능(AI) 시대엔 기술에 대한 ‘신뢰’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더라도 프라이버시 침해나 강제적 기능 사용 같은 문제가 있다면 세계인은 그 AI 모델과 시스템을 채택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뢰 또한 소프트파워의 영역입니다. 소프트파워가 무엇이고, AI 시대에 소프트파워가 왜 더 중요해지는지, 우리나라의 경쟁력은 어떤지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성장과 국가경쟁력, 하드파워만으론 부족
'신뢰' 중요한 AI시대에 소프트파워 급부상
소프트파워(soft power)란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가 1990년대부터 주창해온 개념입니다. 그는 군사력, 경제력 같은 하드파워만으로는 21세기의 국제정치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문화와 정치적 가치(민주주의, 인권 등), 대외정책(국제규범 준수, 다자주의 등)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소프트파워가 더 중요해졌다는 얘기입니다. 과거 소련의 스탈린은 교황이 사단을 몇 개나 갖고 있느냐고 비웃었지만, 교황청은 오늘도 건재하고 소련은 사라졌다는 사실이 하나의 예화로 소개됩니다.

완력보다 마음 사로잡는 매력

조금 더 들여다볼까요? 조지프 나이는 ‘권력(power)’을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타인의 행동을 바꾸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수단으로 △강제(coercion) △보상(payment) △매력·설득(attraction)이 있는데, 세 번째가 바로 소프트파워입니다. 하드파워가 다른 사람의 팔을 비트는 힘이라면, 소프트파워는 마음을 사로잡는 힘입니다. 결국 소프트파워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스스로 원하게 만드는 능력’이고, 소프트파워 강국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모방하고 싶어 하는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프트파워는 한 나라의 외국인직접투자(FDI)와 관광객 유입을 늘리며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강화에 긍정적 효과를 갖는다는 실증 연구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 에든버러대-영국문화원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특정 국가의 문화원이 진출한 국가 수가 1% 늘어나면 그 나라로 들어오는 FDI가 0.66%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제기구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세르한 제비크 등 연구자는 2025년 논문(Guns and Roses: Hard Power, Soft Power and Economic Growth)에서 하드파워는 경제성장에 양(+)의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음(-)의 관계를 보이는 반면, 소프트파워는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성장 기여도가 크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소프트파워는 국제통화기금(IMF)의 GSPI(Global Soft Power Index), 민간의 브랜드파이낸스 GSPI, 소프트파워30 등 지수에서 비교해볼 수 있어요. 올해 브랜드파이낸스 GSPI 국가 순위는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순입니다. 우리나라는 11위로, 2020년의 20위권에서 계속 상승 중입니다.

분산되는 권력과 소프트파워

인공지능(AI) 시대엔 소프트파워의 가치가 어떻게 될까요? 실마리는 나이의 저작 속에 있습니다. 그는 저서 <권력의 미래(The Future of Power)>에서 정보화 시대에는 소프트파워, 하드파워만으론 부족하며, 강압과 설득을 결합한 ‘스마트파워(smart power)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구·영토·군사력만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만들고 타인을 설득하는 능력을 기르는, 이른바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의 최적 조합이 현대 국가전략의 핵심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기술 발전은 더 작은 행위자들도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게 해주는 권력의 분산을 가져온다”고 갈파했습니다.

AI 시대는 ‘누가 가장 강한 AI를 갖느냐’의 경쟁에서 ‘누구의 AI를 세계가 믿고 자발적으로 쓰느냐’의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고성능의 AI 모델과 시스템이 있다고 해도 감시나 프라이버시 침해, 알고리즘 편향, 강제적인 기능 사용 등 문제가 있다면 세계 각국이 채택하지 않습니다. AI 시대의 리더십은 다른 나라와 기업,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채택하는 AI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글로벌 영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신뢰(trust)야말로 AI 시대 소프트파워의 ‘핵심 화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랜드연구소도 예언합니다. 컴퓨팅 파워가 확대되고 오픈소스 방식으로 기술이 개방되면서 영향력 큰 AI 모델을 개발하는 능력은 점점 더 분산될 것이고, 단일 강대국이 AI를 독점하는 시대는 끝날 것이라고 말입니다.NIE포인트1.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는 ‘동전의 양면’이란 주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2. 하드파워는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한계가 있을까?

3. 소프트파워 강국이 되기 위한 조건이 있다면?"한국은 작지만 매력적인 문화강국"
역사·콘텐츠·투자 잇는 가치사슬 중요
지난 21일 방탄소년단의 광화문 공연에 전 세계 BTS 팬 아미(ARMY)가 총결집했습니다. 서울 시내 주요 숙박 시설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예약이 마감됐고, 관람권 추첨에 수백만 명의 팬이 몰렸어요. 공연장 주변에서 노숙도 불사하겠다며 “서울로, 서울로”를 외친 아미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한국 자체가 새 문화 코드

이번 공연은 지구촌의 군사 대결, 국제 제재, 진영 블록화 등과는 정반대 이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랑·소통·공존·평화의 메시지를 세계 곳곳에 발신했죠. 글로벌 분쟁이 격화할수록 ‘비 군사적인 국제 영향력’은 가치를 더합니다. 한류, 즉 K-컬처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BTS의 정규 5집 ‘아리랑’ 발매 직후 열린 이번 공연은 전통 민요에서 얻은 모티프와 현대 팝을 결합한 연출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K-팝이 상업적 목적의 음악을 넘어, 한국의 역사와 민족 정체성까지 묶어내는 문화 코드라는 사실을 알렸죠. 이는 K-팝 소비에 그치지 않고 한글, 한국 전통문화, 역사 등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한국)유입-체류-학습-여행-투자’까지 이어지게 합니다. ‘소프트파워 가치사슬’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연 무대가 된 광화문의 상징성도 큽니다. K-팝의 인기는 우리 정치·역사·문화와 민주주의의 경험이 응축된 공간과 어우러지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번 공연으로 한국은 국제적 대중문화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는 나라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입니다. 콘텐츠의 형식, 팬덤의 운영, 라이브 연출, 온·오프라인 결합 등에서 K-컬처 전반이 해외의 벤치마크 대상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한국은 ‘작지만 매력적이고,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문화 공급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죠. 길게 보면 외교·통상·안보 이슈에서도 한국에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한글 학습 붐에 주목

공연 직전 나온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아카데미상 2관왕(장편 애니메이션상, 주제가상) 수상 소식도 의미심장합니다. 아카데미상은 미국식 작법과 문화 코드에 충실한 작품에 상을 수여해온 전통이 있습니다. 이번 아카데미상 수상은 미국 문화의 주류가 K-컬처를 제대로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요. 세계 문화의 중심부에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진입한 겁니다.

K-컬처의 세계적 인기는 새로운 주목거리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 국내 음반 판매량은 감소하고 있지만, K-팝의 인기로 인해 음반 해외 수출은 반대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2025년 기준 K-팝 음반 수출액은 전년 대비 3.4% 증가한 3억170만 달러를 기록해 역대 최고를 달성했습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애니메이션은 넷플릭스에서 3억 뷰를 돌파했고, 드라마 ‘오징어게임 시즌 3’는 93개국의 스트리밍 차트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어요. 종합 무대예술인 뮤지컬에서도 한국 창작물이 인기입니다. K-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고, 공연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에서 작년 6관왕 영예를 안았어요. K-뷰티, K-푸드, K-관광에 이어 한글 학습 붐도 일고 있습니다. 한국어 학습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4년 72억 달러를 돌파했으며, 2034년까지 연평균 25%씩 늘어날 것으로 추산됩니다.

급부상 중인 소프트파워

“한국은 소프트파워 강국인가”라고 묻는다면, “급부상 중인 강국은 맞는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BTS 공연 등을 통해 문화·가치·감성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프트파워 국가임을 확인했습니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은 지론인 문화선진국론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선견지명에 고개가 숙여집니다.NIE포인트1. 소프트파워의 가치사슬(value chain)은 어떻게 형성될까?

2. 자신이 느낀 K-컬처의 경쟁력을 주제로 친구들과 토론해보자.

3. 문화 경쟁력만으로 소프트파워 강국이 될 수 있을까?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