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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동 분쟁으로 미국이 차익거래 이익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석유 에너지 패권과 기축 통화 지위를 앞세우면서다. 이번 지정학적 위기가 글로벌 경제의 불균형을 심화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중동 분쟁으로 나타난 가격 차이20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브렌트유는 전날 배럴당 111.07달러까지 치솟았다. 반면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98.61달러까지 올랐다. 18일 장중 기준 WTI와 브렌트유의 스프레드(격차)는 배럴당 12.05달러까지 확대됐다. 두 원유는 2015년 3월 이후 11년 만에 최대 가격 차이를 기록했다.
최근 이란의 핵심 에너지 인프라인 사우스 파르스 가스전 등에 대한 공격,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대한 군사적 위협 등이 중동산 원유를 기준으로 삼는 브렌트유에 '전쟁 프리미엄'을 부과한 영향이다. 반면 북미 내륙에서 파이프라인망을 통해 유통되는 WTI는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로부터 물리적으로 격리돼 있다.
이런 가격 괴리의 바탕에는 미국이 셰일 혁명 이후 십수 년간 축적해 온 에너지 펀더멘털이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지난 18일 발표한 주간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는 전주 대비 620만 배럴이 증가한 4억 4,930만 배럴을 기록했다.
전 세계가 중동발 원유 공급 부족에도 높은 자급률을 앞세워 미국은 자국 내 생산 능력과 탄탄한 비축량을 바탕으로 가격 상승을 억제하고 있다. 일각에선 미국이 내수 시장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WTI로 방어하면서도 잉여 원유를 비싼 브렌트유 가격을 기준으로 해외 시장에 밀어내며 글로벌 자본을 자국으로 이전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1년 만에 최대치로 벌어진 WTI와 브렌트유의 가격 차이는 글로벌 원유 트레이더와 해운 업계에 차익거래를 안겼다. 두 원유 간 12달러가 넘는 가격 차이는 전쟁으로 급등한 해상 운임 상승분을 상쇄하고 남을 만큼의 마진을 보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그널 매리타임의 게오르기오스 사켈라리우 용선 애널리스트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미국 멕시코만에서 유럽으로 최대 70만 배럴의 원유를 운송하는 아프라막스급 선박의 운임이 전쟁 전 436만 달러에서 600만 달러로 급등했지만 WTI-브렌트 스프레드(가격 차이)가 운임 비용을 상쇄할 만큼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영국 스파르타 코모디티스의 닐 크로스비 연구원은 "인프라 공격이 브렌트 랠리의 핵심 동인이 될 것이며, WTI는 차익거래 관점에서 싸 보이기 때문에 유럽으로 대거 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18일 발표된 EIA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수출은 전주 대비 하루 147만 배럴 증가한 490만 배럴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수준의 물동량을 쏟아내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은 직격탄반면 에너지를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아시아와 유럽의 정제 및 물류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일본의 평균 휘발유 소매 가격은 16일 기준 리터당 190.8엔으로 일주일 새 18%나 급등했다.
원가 부담을 견디지 못한 일본 정유사들의 공장 가동률은 전쟁 전 80%대에서 3월 중순 69.1%로 떨어졌다. 인도의 경우에는 폭등한 에너지 대금 결제로 3월 중순 주요 국영 연료 판매사들의 액화석유가스(LPG) 판매가 전월 동기 대비 26.3% 급감했다.
물류 병목 현상은 항공 화물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 노선이 사실상 봉쇄되자, 아시아에서 북미와 유럽으로 향하는 긴급 부품과 이커머스 물량들이 대거 항공으로 몰려들었다. 쉬인, 테무 등 중국발 이커머스 플랫폼들은 매일 보잉 777 화물기 수십 대 분량의 물량을 쏟아내며 글로벌 항공 화물 운임을 폭등시켰다.
미국이 유가 스프레드(가격 차이)로 '교역조건의 상대적 승자'로 올랐지만 미국 경제에 호재로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우선 미국 내 소비자물가 상승이다. 미국 정유사도 글로벌 시장 가격에 연동해 마진을 추구하기 때문에 미국 소비자들 역시 에너지 인플레이션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로이터에 따르면 전쟁 발발 직후 한 달 만에 미국의 주유소 가솔린 및 디젤 소매가격은 20% 이상 급등했다.
EIA의 지난 16일 기준 소매가격 동향을 보면 일반 휘발유는 갤런당 3.720달러, 도로용 디젤은 갤런당 5.071달러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차익거래로 벌어들인 국가적 부가 일반 소비자의 지갑을 채워주지 않는다. 반면 일상적인 유류비 상승은 가계의 실질 가처분소득을 줄이고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 미국 내수 경제를 위협하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달러 강세와 유가 급등이 결합할 경우 글로벌 무역량 자체가 급격히 감소할 수도 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연구에 따르면, 달러가 10% 상승할 경우 글로벌 교역량은 기준 전망치 대비 6~8% 감소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달러 표시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아시아 신흥국과 유럽의 실질 구매력이 감소하면, 결국 미국산 첨단 제품과 소비재에 대한 글로벌 수요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극단적인 유가 가격 충격은 장기적으로 화석연료에 대한 수요 파괴를 불러올 가능성도 크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는 중동의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에너지 전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이 비싸고 변동성이 큰 화석연료 수입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리하다"며 "지난 25년간 원전 비중을 줄인 것은 전략적 실수였다"고 말했다.
지정학적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면서 미국 중앙은행(Fed)은 긴축의 끈을 다시 조일 전망이다. 지난 18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Fed는 기준금리를 3.50%~3.75% 범위로 동결했다.
Fed의 경제전망요약(SEP) 점도표를 보면 연말까지 금리 인하 기대는 단 한 차례로 축소됐다.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 전망치는 기존 2.5%에서 2.7%로 상향 조정됐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단기적으로 에너지 가격의 급등은 미국의 전반적인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을 밀어 올릴 것이 분명하며, 경제에 미칠 잠재적 파급 효과의 범위와 지속 기간을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설명했다. Fed의 '매파적 동결'은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달러의 가치를 뜻하는 달러 인덱스(DXY)를 100 이상으로 솟구치게 했다.환율도 부담국제 원유 거래가 페트로 달러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아시아 수입국은 이른바 '환율 패스스루'를 경험하고 있다. 국제 유가가 40% 오르고 현지 통화가 10% 절하되면 수입국이 체감하는 경제적 고통은 50% 이상으로 증폭된다.
인도의 경우에는 지난 18일 종가 기준 루피화가 달러당 92.63루피로 사상 최저치를 경신했다.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 포트폴리오 투자(FPI) 자금은 3월 한 달 동안 인도 주식시장에서만 약 80억 달러가 이탈했다.
세계 경제 4위 대국 일본의 사정도 어렵다. 엔화는 달러당 159.655엔 선까지 밀리며 심리적 마지노선인 160엔 붕괴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의 시게토 나가이 일본 경제 책임자는 "치솟는 에너지 비용이 근원 인플레이션을 재가속화시켜 실질 소득 성장을 제한할 것"이라며 "교역조건 충격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일본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우려가 커지면서 일본은행은 향후 금리 인상에 더욱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한국도 처지도 비슷하다. 수출 주도형 개방 경제이자 에너지 자원의 90% 이상을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국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원·달러 환율은 심리적 저지선인 1500원을 돌파했다.
지난 17일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원화 기준 수입물가지수는 8개월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원유 수입 단가는 두바이유 상승과 강달러가 중첩되면서 전월 대비 9.8%나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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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