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 수장들 줄줄이 한국행…AI시대 '하드웨어 허브' 입증

입력 2026-03-19 17:20
수정 2026-03-20 01:11
“고대역폭메모리(HBM)부터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 등 미래 사업에 관한 모든 것을 논의했습니다.”

리사 수 AMD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8일 삼성전자 경기 평택사업장을 둘러보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만찬을 한 직후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나 한 말이다. 엔비디아의 최대 적수인 AMD가 차세대 AI 반도체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삼성전자를 핵심 파트너로 낙점했다는 사실상의 선언이다. 수 CEO가 1박2일간 삼성 반도체 경영진과 보낸 시간은 무려 7시간. 한국 반도체 기업의 위상이 단순한 ‘메모리 공급사’를 넘어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수 CEO는 취임 후 대만, 일본, 중국을 수차례 방문하면서도 한국은 찾지 않았다. AMD는 삼성전자와 서로 어려울 때 도운 ‘20년 지기’였지만 직접 한국을 방문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메모리 공급 비중은 크지만 TSMC를 보유한 대만과 ‘소부장’ 생태계가 탄탄한 일본에 비해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굴욕적 평가가 나온 이유다.

AI 열풍이 몰아치며 세상은 바뀌었다. 수 CEO는 이번 방한 기간 내내 “삼성은 AMD의 완벽한 파트너”라며 치켜세웠다. AMD뿐만이 아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역시 최근 ‘GTC 2026’에서 삼성전자를 향해 “정말 감사하다. 삼성은 세계 최고”라고 했다. SK하이닉스에 대해서도 “완벽하다”고 극찬했다.

앤스로픽, 피규어AI 등 실리콘밸리의 신흥 테크 기업도 한국 반도체 기업과의 미팅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콧대 높던 빅테크가 이제는 한국 기업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며 “반도체 패권의 갑을 관계가 완전히 역전됐다”고 말했다.

글로벌 빅테크가 한국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명확하다. AI 반도체 성능이 고도화할수록 이를 제대로 뒷받침할 하드웨어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과거 반도체 전쟁이 ‘누가 더 작게 만드느냐’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누가 더 거대한 AI 생태계를 안정적으로 제때 떠받치느냐’의 싸움이 됐다.

특히 삼성전자의 턴키 솔루션은 ‘결정적 한 방’이 됐다. HBM과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한 곳에서 해결할 역량을 갖춘 곳은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여러 업체를 거치지 않고 삼성 한 곳에서 프로세스를 끝내면 제품 개발 기간을 약 20% 단축할 수 있다. 1분1초가 급한 AI 전쟁터에서 이는 생존 문제와 직결된다. 젠슨 황 CEO가 삼성에 차세대 칩 제조를 맡기며 고마움을 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올해 HBM4(6세대) 시대가 본격화하며 K반도체의 영향력이 더욱 세질 것으로 보고 있다. 메모리가 단순히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넘어 연산까지 수행하는 ‘로직 칩’ 성격을 띠게 되면서 파운드리와 메모리 기술을 동시에 보유한 K반도체는 ‘한국 제조업의 힘과 가치’를 극대화하는 선봉장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폭증하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난을 해결할 기술력 역시 한국이 독보적이다. 삼성 평택 캠퍼스와 SK하이닉스의 경기 용인 클러스터는 글로벌 AI 생태계의 존립을 결정짓는 ‘전략적 하드웨어 허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한국 없이는 AI 칩을 못 만든다”는 말은 이제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