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발전할수록 소비는 더 단순해질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오늘의 소비자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원하는 물건을 즉시 받아볼 수 있는 시대, 사람들은 오히려 줄을 서고, 시간을 들이고, 불편을 감수하는 경험에 기꺼이 뛰어든다. 성수동 팝업스토어 앞에 길게 늘어선 줄과 123층 계단을 오르는 행사에 몰리는 인파는 이 역설적인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비행동학자 송수진 고려대 교수의 <경험수집가의 시대>는 바로 이 기묘한 변화의 이유를 파고든다.
저자는 오늘날의 소비자를 ‘경험수집가’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데서 만족하지 않는다. 의미 있고, 재미있고, 상징적인 경험을 선별해 자신의 정체성으로 축적한다. 흥미 없는 콘텐츠는 몇 초 만에 넘기면서도, 밤을 새워 산을 오르는 경험에는 기꺼이 시간을 투자한다. 기술이 일상의 번거로움을 제거할수록,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더 밀도 높은 경험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진단이다.
이 변화는 소비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과거에는 제품의 성능과 가격이 선택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그 제품이 어떤 이야기를 제공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나이키 조던 시리즈처럼 서사를 지닌 브랜드에는 열광하면서도, 스펙만 나열하는 광고에는 무관심한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유튜브 프리미엄이나 유료 멤버십 서비스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시간을 아끼는 경험’을 구매하는 행위로 읽힌다.
저자는 이러한 흐름을 일시적 유행이 아닌 구조적 변화로 본다.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에 ‘소유’는 더 이상 차별화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무엇을 경험했고, 그 경험이 나를 어떻게 설명해주는지가 중요해진다. 소비는 더 이상 필요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정체성을 실험하고 구축하는 과정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할까. 책은 해답을 ‘휴먼 포지셔닝’에서 찾는다. 기술이나 가격 경쟁이 아닌, 소비자의 감정과 시간, 관심을 얼마나 존중하느냐가 브랜드의 핵심 경쟁력이 된다는 것이다. 소비자는 더 이상 브랜드가 만든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시몬스 테라스’나 다양한 체험형 매장처럼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고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을 설계하는 기업이 선택받는 이유다.
이 책은 소비를 바라보는 익숙한 관점을 뒤집는다. 무엇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소비자에게 어떤 순간을 남겼는가를 묻는다. 결국 오늘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설계하는 능력이야말로, 브랜드의 생존을 가르는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