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격벽 하나 사이 '해체 vs 부활'…500兆 원전 시장 열린다

입력 2026-03-19 13:22
수정 2026-03-19 13:27

지난 18일 찾은 부산 기장군 고리 원자력 발전소 단지. 고리 1호기 터빈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거대한 초록색 저압 터빈과 발전기가 적막 속에 놓여 있었다. 한 때 원자로에서 만든 증기를 받아 전기를 생산하던 핵심 설비들이다. 벽면 한 쪽엔 ’내가 조인 나사 하나 안전운전 약속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지만, 40여년간 증기발생기로 물을 공급하던 주급수 배관과 복수 펌프 곳곳에는 빨간 글씨로 적힌 ‘미사용 설비’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고리 1호기가 퇴역 후 사전 해체 작업에 돌입했다. 국내 첫 상업용 대형원전 해체 사례다. 고리 2호기 계속운전과 1호기 해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건설 중심이던 원전 사업이 ‘전주기 산업’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에 놓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500兆 '원전 해체 비즈니스' 개막이날 외부에 처음으로 공개된 고리 1호기 해체 작업은 사전작업을 마친 뒤 하반기 본격 착수될 전망이다.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 1호기는 587메가와트(MWe)급 가압경수로로, 2007년 한 차례 수명 연장을 거친 뒤 2017년 영구 정지됐다. 이후 해체계획 승인 절차를 거쳐 지난해 최종 인허가를 받았다. 약 12년에 걸쳐 해체가 진행되며, 2037년 부지 복원이 목표다.총 해체 비용은 1조713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현재 작업은 방사선 영향이 없는 터빈·발전기 등 ‘비방사선 구역’부터 시작됐다. 원자로 내부와 직접 연결된 1차 계통과 달리 상대적으로 안전한 2차 계통 설비를 먼저 철거하는 방식이다. 이른바 ‘콜드 투 핫(Cold to Hot)’ 접근법으로, 방사선 오염이 낮은 구역부터 해체해 경험을 축적하고 이후 고오염 구역으로 단계적으로 진입하는 전략이다. 시간 경과에 따라 방사능이 자연 감소하는 점도 고려한 방식이다.

권하욱 한수원 공사관리부장은 "비방사선 구역은 올해 상반기 비계를 쌓고 보온재를 철거하는 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라며 "하반기부터 바깥 작은 설비부터 먼저 해체하고 연말 터빈과 발전기 해체에 작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체부터 계속운전까지…원전 전주기 산업화고리 1호기 해체는 단순한 설비 철거를 넘어 새로운 산업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50년까지 전 세계에서 최대 588기의 원전이 영구 정지될 전망이다. 기당 해체 비용을 고려하면 시장 규모는 500조원을 웃돈다. 현재 국내 해체 기술의 약 90%가 국산화된 상태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상용화 단계로 진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원호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은 “한 기의 해체 경험은 향후 다른 원전에 반복 적용할 수 있는 표준 공정으로 축적된다”며 “글로벌 시장 진출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속운전 승인 이후 재가동을 위한 막바지 절차에 들어간 고리 원전 2호기 계속 운전도 주목할만하다. 이날 찾은 고리 2호기 구역은 두터운 격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분당 1800번(1800RPM)의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터빈 발전기가 내뿜는 저주파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달됐다. 전력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맞춰야 하는 속도다. 2023년 설계수명 만료 이후 대대적인 설비 개선을 거쳐 계속운전(수명 연장)을 앞둔 2호기는 여전히 전력을 생산하는 설비로 기능하고 있었다.

한수원은 수명 만료 기기 교체와 사고 대응 설비 보강 등 100여건의 설비 개선을 마쳤다. 노후 설비를 새것으로 바꾸고 안전 기준을 최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여기에 외부 전원이 모두 끊길 경우를 대비한 이동형 발전차와 외부 냉각수 주입 설비 등 중대사고 대응 장치도 추가됐다. 재가동 시점은 이르면 올해 3월 말으로 예상된다.

경제성 측면에서도 계속운전은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수명 연장 비용이 신규 원전 건설비의 10~2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수조원이 드는 신규 건설 대신 기존 설비를 활용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전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최 위원장은 “계속운전은 기존 인프라를 활용하면서 필요한 설비만 보강하는 방식”이라며 “에너지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전력 수급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