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가 피고 나무 썩는 퀴퀴한 냄새가 나던 연습실.'
방탄소년단(BTS)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며 멤버 진이 적은 글이다. 지하에 터를 잡은 연습실은 비가 오면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땀 흘려 연습하고 나면, 거울엔 어김없이 습기가 가득 끼었다. BTS 신화는 이렇게 서울 논현동의 한 건물 지하에서 시작됐다.
JYP·SM·YG 등 '빅3'가 아닌 당시만 해도 중소 기획사(빅히트 뮤직·현 하이브)에서 데뷔한 탓에 BTS는 '흙수저 아이돌'로 불렸다. 홍보·마케팅 등 체계적인 지원을 받는 대형 기획사 팀들과는 출발점부터 달랐다. 음악방송은 쉽게 무대에 오를 수 없는 '높은 벽'이었고, 예능 출연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랬던 BTS가 공연업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2015년 무렵이었다. 진원지는 국내가 아닌 해외였다. 말레이시아·미국·호주·태국·멕시코·브라질·칠레·홍콩 순회 투어를 마치자마자 팬덤 규모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 준수한 외모에 현란한 춤사위, 솔직한 가사를 마주한 젊은이들은 곧 BTS 팬이 됐다.
국내 시장은 정면 돌파 대신 유튜브를 활용한 우회 전략을 썼다. 대형 기획사가 아닌 만큼 공중파 방송이나 음악 전문 채널을 뚫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BTS는 유튜브에 '방탄TV'라는 채널을 만들어 방송국처럼 활용했다. 자체적으로 기획한 콘텐츠를 끊임없이 내놓는 방식으로 팬들에게 스며들도록 하는 전략이었다. K팝 마케팅 표준이 된 '자체 콘텐츠'의 시초다. 트위터(현 X)는 팬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는 또 다른 무기였다. SNS를 많이 쓰는 라틴 아메리카와 동남아 팬을 끌어냈고, '보라색 바람'은 곧 미국과 유럽도 덮쳤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상남자), '우릴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 건 누구'(N.O)냐고 묻던 기세 넘치는 10대들은 '태초의 DNA가 널 원하는데'(DNA)라고 고백하고, '널 위해서라면 난 슬퍼도 기쁜 척 할 수가 있었어'(페이크 러브)라며 좌절도 맛보는 20대를 거쳤다. 힘든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는 '이 겨울도 끝이 나요'(봄날)라고 위로했고,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도시를 빛으로 물들일 거야'(다이너마이트)라며 희망과 긍정의 기운을 퍼트렸다.
해외 아미(공식 팬덤명)들이 BTS에 빠지게 된 계기를 이들의 들려주는 음악, 그 자체로 꼽는 이유다. BTS는 데뷔 초부터 국경을 넘어 팬들과 소통하며 사랑과 고민을 나누는 친구가 됐다.
BTS가 음악에 담은 '공감의 힘'은 이렇게 전세계를 보라색으로 물들였다.
운도 있었다. BTS가 데뷔할 당시 세계 최대 음악시장인 미국에선 대형 레이블이 주도하는 보이 그룹 대신 싱어송라이터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된 상태였다. 미국이 보이 그룹을 포기한 바로 그 때 한국에선 빅뱅·샤이니·투애니원 등 보이그룹과 걸그룹이 전성기를 맞았고, 제작 시스템은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됐다. 보이 그룹이 사라진 미국에서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매력으로 똘똘 뭉친 BTS는 스트리밍·SNS·유튜브 등 새로운 무기를 활용해 미국과 유럽시장을 뚫었다.
논현동 지하 연습실에서 익힌 재주로 세계를 접수한 BTS는 이제 K팝의 본산인 한국에서 '왕의 길'을 걷는다. 경복궁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을 걷는 이들이 특별한 건 모든 멤버가 한국인이란 것도 한몫한다.
BTS는 언제나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대놓고 드러냈다. '마 시티' 가사에 일산·부산·광주·대구 등 출신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녹였고, 글로벌 스타가 된 뒤에도 '아이돌'이라는 곡에 "얼쑤 좋다", "지화자 좋다" 등의 추임새를 넣었다. 공연에서는 북청사자놀음을 선보였으며, 콜드플레이에 개량한복을 선물하기도 했다.
신보의 타이틀은 전통 민요인 '아리랑'이다. 국립박물관문화재단과 국보 성덕대왕신종 문양을 모티브로 한 협업 굿즈도 선보였는데, 앨범에는 국보 번호를 그대로 옮긴 'No.29'라는 트랙이 수록됐다. '아리랑' 한글 필체를 붉은 원 세 개에 녹여낸 앨범 로고 디자인 작업에는 멤버 정국이 참여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