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100달러의 역습…Fed 금리인하 꿈 삼킨 호르무즈의 불길[글로벌 현장]

입력 2026-03-25 20:29
수정 2026-03-25 20:30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해협이 막히면서 국제유가가 급격한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군함 파견을 요청했지만 동맹국들이 사실상 퇴짜를 놓거나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 국제유가의 변동성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IG의 시장 분석가 토니 시카모어는 메모에서 “위험이 여전히 엄중하다”며 “이란 민병대 하나가 지나가는 유조선에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기뢰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상황 전체가 다시 불붙을 수 있다”고 했다. 아직은 ‘비교적’ 안정적
최근 브렌트유와 서부텍사스유(WTI)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위협하며 세계 경제에 경고등을 켜고 있다. 다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 가격’을 따져보면 과거의 충격에는 아직 못 미친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의 소비자물가지수(CPI) 환산 데이터에 따르면 1974년 1차 오일쇼크 당시의 12달러는 현재 가치로 약 120달러에 달하며 1980년 2차 오일쇼크 당시의 39달러는 약 162달러에 육박한다. 즉 현재의 100달러 수준은 과거 전면전 당시의 파괴력에 비하면 약 60~70% 수준의 압력이다. 이는 숫자가 주는 공포보다 시장의 내성이 강해졌음을 시사한다.

과거 중동의 감산 결정 한 번에 세계경제가 휘청였던 이유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의 2026년 3월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일일 1360만 배럴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미국은 이제 단순한 소비국이 아니다. 유가가 상승하면 수익성이 좋아진 셰일가스 업체들이 즉각 시추기를 늘려 공급을 메우는 이른바 ‘스윙 프로듀서’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 중국의 경기 둔화에 따른 수요 감소와 사상 최대 규모인 4억1500만 배럴의 전략비축유 방출 결정은 고유가의 상단을 억제하는 강력한 완충장치가 되고 있다. 전쟁 장기화 시 상황 달라져
하지만 세계경제가 현재와 같은 급격한 변동성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함이 투자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에 따른 공급 차질분을 비축유로 메울 수 있는 양은 20일 치에 불과하다. IEA가 방출하기로 한 비축유는 4억 배럴, 호르무즈해협 하루 수송량은 2000만 배럴이기 때문이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도 이번 비축유 방출이 임시방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가 유가 급등을 의식해 비축유 방출이 20일째 되는 3월 말, 4월 초에 종전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골드만삭스도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비슷한 시점에 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형 유조선 침몰이나 민간 항공기 격추, 또는 사우디아라비아 핵심 송유관 공격과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경우 시장의 판단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기름값 10% 오르면 물가 0.4% 뛴다
유가 상승은 미국 물가(CPI)에 치명적이다. 골드만삭스와 RBC 이코노믹스의 분석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10% 오를 때마다 미국의 헤드라인 CPI는 약 0.2~0.4%포인트 직접 상승하는 효과를 낸다.

원유 가격 상승은 물류비 인상으로도 이어진다. 물류 비용 인상은 물론 플라스틱, 비료 등 기초 원자재 가격을 밀어올려 ‘근원물가’의 하방 경직성을 강화한다. 이는 미국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즉각적으로 탈취하며 경기침체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현재 미국 전역 휘발유 평균 가격은 갤런당 3.58달러 수준이다. 미국인들에게 4달러는 단순한 가격 이상의 심리적 저지선이다.

이 선을 넘어서는 순간 소비자심리지수는 즉각 5~10% 급락하며 재량 소비 지출이 닫힌다. 2022년 갤런당 5달러 돌파 당시 집권 여당의 지지율이 폭락했던 사례는 유가가 경제를 넘어 정치적 생존과 직결된 변수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란전이 예상보다 길어질 경우 월가가 주목하는 시점은 3월 CPI와 개인소비지출(PCE), 생산자물가지수(PPI) 등 국제유가를 반영한 물가 지표가 발표되는 4월 중하순이다. 3월 CPI는 4월 10일, PPI는 4월 14일 나온다. 3월 PCE는 4월 30일 발표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앙은행(Fed)의 금리인하를 강하게 주장하는 가운데 물가가 튀어 오를 경우 Fed의 금리인하 시점은 하반기 이후로 미뤄질 수 있다. 또한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층 이탈을 막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도 정치적으로 이란전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수요 파괴 시작되나”…100달러 임계점
월가는 배럴당 100달러를 단순한 숫자가 아닌 ‘수요 파괴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과거 사례를 보면 유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항공·물류·소비 전반에서 수요 위축이 빠르게 나타난다. 특히 미국의 경우 휘발유 가격 상승이 실질임금 감소로 직결되기 때문에 소비 둔화로 이어지는 속도가 빠르다.

JP모간은 보고서에서 “유가가 110~120달러 구간에 진입할 경우 글로벌 성장률이 0.5%포인트 이상 하락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뿐 아니라 경기 자체를 훼손하는 ‘이중 충격’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유가 급등은 단순히 에너지 시장에 그치지 않고 금융시장 전반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선 안전자산 선호가 강화되며 달러 강세 압력이 커진다. 이는 신흥국 자본 유출을 유발하고 글로벌 금융 여건을 긴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인플레이션 기대 상승으로 미 국채금리는 상방 압력을 받는다. 이는 성장주 중심의 주식시장에 부담으로 작용하며 특히 AI·빅테크 중심의 고밸류에이션 종목들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 결국 유가는 ‘인플레이션 변수’를 넘어 글로벌 자산 가격의 방향을 결정짓는 핵심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물리적 공급 차질보다 더 빠르게 나타나는 것은 보험과 해운 시장의 경색이다. 전쟁 리스크가 확대되면서 해상 보험료가 급등하고 일부 선박은 호르무즈해협 통과 자체를 기피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원유가 실제로 생산되더라도 시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물류 병목’을 만들어내며 가격 변동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된다. 특히 초대형유조선(VLCC)의 운임 상승은 단기 유가 급등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 “Fed의 딜레마”…인플레이션 vs 경기
국제유가 급등은 Fed의 통화정책을 다시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그동안 시장은 인플레이션 둔화를 근거로 연내 금리인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유가 상승은 헤드라인 물가를 직접 자극하는 동시에 기대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는 변수로 작용한다. 이는 Fed가 가장 경계하는 ‘물가 재가속’ 시나리오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Fed가 처한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가 상승은 물가를 자극하는 동시에 소비를 위축시키며 성장률을 끌어내리는 ‘스태그플레이션 충격’을 동반한다. 금리를 유지하거나 인상할 경우 경기 하방 압력이 커지고 반대로 금리를 인하할 경우 물가를 자극할 수 있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이번 유가 상승이 공급 측 충격이라는 점에서 통화정책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Fed가 금리를 조정한다고 해서 원유 공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Fed 내부에서도 ‘정책 대응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월가는 이에 따라 Fed가 당분간 상황을 지켜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로 유가가 100달러를 상회하는 구간에서 CPI 상승 압력이 확인될 경우 금리인하 시점은 시장 예상보다 크게 늦춰질 수 있다.

뉴욕=박신영 한국경제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