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필요 없는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스위스 승강기 업체 쉰들러가 제기한 투자자-국가 분쟁해결(ISDS)에 오랫동안 관여한 한 관계자는 한국 정부의 승소가 전해진 날 이같이 말했다. 3250억원 규모의 배상 청구를 막아내고 소송비용 96억원까지 회수한 ‘완승’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분쟁 초기 단계부터 정부가 체계적으로 대응했다면 8년에 걸친 장기 소송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설명이다.
쉰들러 사건의 출발점은 기업 간 경영권 갈등이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유상증자 등을 실시하자 2대 주주였던 쉰들러는 이 과정에서 투자 손실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이 한국 규제당국에 있으니 손실을 물어내라며 국제중재를 제기했다.
중재 끝에 나온 결론은 단순했다. 한국 규제당국의 부작위는 외국 투자자를 차별한 것이 아니며, 투자 협정을 위반한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확인하는 데 8년의 세월과 막대한 소송 비용이 투입된 셈이다.
ISDS는 외국 투자자가 정부 정책이나 규제로 손해를 봤다고 판단할 경우 해당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투자자 보호라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기업 간 분쟁이나 단순 투자 실패가 정부를 향한 ‘막무가내식 소송’으로 확대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쉰들러 사건 역시 경영권 갈등이 ISDS로 번진 사례라는 분석도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ISDS는 다국적 기업과 투자자들이 한 국가의 공공정책을 지나치게 제약하거나 위축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 간 외교 분쟁으로 비화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국회에서도 이 같은 문제의식을 반영한 입법 움직임이 포착된다.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7일 대표 발의한 ‘국제 투자 분쟁의 예방 및 대응에 관한 법률안’에는 법무부 장관이 5년마다 ISDS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관계 부처 간 협력과 정보 공유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전문 인력을 양성할 기관을 지정해 예산을 지원하고 국제 투자 분쟁에 대응할 전담 조직을 꾸리는 등 인프라 구축에 관한 규정도 포함됐다.
론스타·엘리엇 사건에 이어 이번 쉰들러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ISDS 대응 역량이 축적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국회가 ISDS에 대한 사전 대응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마련한 만큼 이제 필요한 건 분쟁이 장기전으로 번지기 전 초기부터 리스크를 차단할 수 있는 정교한 대응 전략을 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