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빅파마가 유전자 치료제에 투자한 돈이 지난해 4분기에 150억달러를 돌파했다. 작년 1~3분기 투자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업계에서는 "빅파마가 펩타이드 치료제의 뒤를 이을 차세대 모달리티(치료접근법)로 유전자 치료제에 주목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흐름을 타고 국내에서도 바이오기업 올릭스 등이 유전자 치료제 개발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빅파마의 유전자 치료제 투자 급증
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초부터 지난달까지 유전자 치료제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에 투자한 빅파마 9곳의 총 투자금액은 338억달러(약 49조6000억원)로 집계됐다. 관련 기술 도입, 인수합병(M&A), 공동 연구 개발 등에 지출한 돈을 모두 합친 금액이다. 금액을 밝히지 않고 투자 사실만 밝혔던 2건을 제외한 나머지 22건을 합산한 수치다.
이 금액은 지난해 초부터 연말로 가며 증가세를 보였다. 1분기 투자 금액은 3억달러에 그쳤지만 2분기에는 85억달러를 기록하며 껑충 뛰었다. 3분기 들어서는 40억달러로 다시 조정을 받았다가 4분기에 165억달러로 급증하며 우상향 흐름을 이어갔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는 45억달러가 유전자 치료제 기술도입 또는 관련 기업 M&A에 투자됐다.
최근 글로벌 바이오업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모달리티는 펩타이드 치료제였다. 당뇨나 비만 치료에 쓰이는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 제제, 골다공증 치료에 쓰이는 부갑상선호르몬(PTH) 제제 등이 대표적이다. 김선아 하나증권 수석연구위원은 "글로벌 시장에서 비만 및 당뇨 관련 R&D 파트너십은 2024년 29건까지 치솟았다가 지난해 19건으로 줄었다"며 "최근 동향은 '대세 모달리티'가 펩타이드에서 유전자 치료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완치 가능성 있고 투약 주기 길어
바이오 전문가들은 "단백질을 표적으로 삼는 기존 치료제로는 질병 원인 유전자를 공략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설명한다. 기존 치료제로 공략할 수 있는 인간 유전자는 0.05%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반면 유전자 치료제는 이론적으로 거의 모든 유전자를 타깃할 수 있다. 질병의 근원인 유전자가 표적이기 때문에 완치를 기대할 수 있고, 투약 주기가 기존 치료제 대비 길다는 것도 장점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달 '생물학적 타당 기전 프레임워크'를 시행하겠다며 초안을 발표한 것도 유전자 치료제 개발사 입장에서 호재다. 이 프레임워크는 희귀 유전병 환자를 위한 규제 가이던스로, 환자 수가 매우 적어 대규모 임상시험이 불가능하더라도 생물학적 기전(인과를 설명할 수 있는 반응)과 소규모 임상 데이터가 있으면 승인 여부를 검토하는 것을 말한다. RNA 치료제는 기전이 명확하고 희귀병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이 프레임워크의 주요 수혜 분야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펩타이드 치료제 시장의 강자인 일라이 릴리도 차세대 먹거리로 유전자 치료제를 겨냥하고 있다. 일라이 릴리가 기술도입, M&A 등으로 유전자 치료제에 투자한 금액은 2023년 11억달러, 2024년 20억달러, 2025년 99억달러 등으로 급증했다. 올 들어서는 지난달까지 35억달러였다. 업계에서는 "일라이 릴리가 차세대 모달리티로 유전자 치료제에 주목하고 있다"고 관측이 나온다.
국내에선 올릭스 등이 선두주자
국내 기업 중에서도 유전자 치료제를 개발하는 기업이 있다. 과거에는 '크리스퍼/카스'처럼 유전자를 직접 편집하는 기술이 주목받았지만, 최근에는 DNA를 직접 수정하지 않고 유전자의 기능 발현에만 관여해 "안전성이 더 높다"고 평가 받는 RNA 치료제가 새로운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코스닥시장 상장 기업 올릭스, 에스티팜, 알지노믹스 등이 대표적인 국내 유전자 치료제 개발 기업이다. 올릭스는 짧은간섭리보핵산(siRNA) 기반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siRNA는 특정 단백질의 생성을 차단하는 물질이다. 올릭스가 개발 중인 대사이상지방간염(MASH) 파이프라인 OLX702A와 탈모 파이프라인 OLX104C는 모두 호주에서 1상 중이고, 황반변성 파이프라인 OLX301A은 미국 1상 종료 뒤 파트너사를 찾고 있다.
에스티팜은 짧은 RNA 또는 DNA 조각으로서 유전자 치료제의 핵심 원료 물질인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를 위탁개발생산(CDMO)하는 기업이다. 이 덕에 유전자 치료제 시장이 성장하면 에스티팜의 매출도 함께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에스티팜은 펜데믹이 한창이었던 때 RNA 기반 코로나19 백신을 출시했던 적이 있다. 최근 생산시설 확대와 대량생산 신기술 개발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12월 상장한 알지노믹스는 기업공개(IPO) 전에 이미 일라이 릴리와 13억달러(약 1조 9000억원) 규모의 플랫폼 기술이전 및 신약 공동개발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알지노믹스의 RNA 편집 플랫폼 'RNA 트랜스 스플라이싱 리보자임'을 활용해 유전성 난청 치료제를 개발하는 내용이다. 이 플랫폼은 돌연변이 유전자 제거와 치료용 단백질 발현을 동시에 할 수 있게 해준다. 현재 간암, 알츠하이머병, 유전성망막성질환 등의 치료제를 1상 또는 임상 이전 단계에서 자체 개발 중이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