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의 봄날, 시와 음악과 도다리쑥국…[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6-03-17 17:51
수정 2026-03-18 00:07

얼마나 애틋했으면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을까. 북방 시인 백석은 남쪽 끝 통영을 세 번이나 방문했다. 친구 결혼식에서 한눈에 반한 통영 출신 이화여고생 ‘난(蘭, 본명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짝사랑하는 여인은 거기 없었다. 갈 때마다 길이 엇갈렸다. 낙심한 그는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아 울 듯 울 듯 손방아만 찧었다.

당시 그는 경부선 열차를 타고 삼랑진을 거쳐 구마산역에 내린 다음 객줏집에서 자고 뱃길로 반나절 더 가서 통영에 도착했다. 그 먼 길에 어렵사리 꺼낸 청혼은 거절당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더 강렬하고 기억도 오래간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이가르니크 효과’ 혹은 ‘미완성 효과’ 때문일까. 백석에게 통영은 못다 한 사랑과 미완의 결핍이 교차하는 안타까운 항구다. 어쩌면 그 덕에 통영의 역사가 더 풍요롭고, 서정과 서사의 폭도 넓어졌는지 모른다. 청마문학관엔 빨간 우체통이 90년 전 그의 회한을 되짚으며 봄맞이 통영 기행에 나섰다. 옛 이틀 길을 고속버스로 네 시간 만에 닿았다. ‘난’이 살던 집 주소는 명정동 396.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한 그녀의 옛집 건너편엔 오래된 우물 두 개 ‘명정(明井)’이 나란히 있다. 다정한 부부 같다. 맞은편 공원의 시비에는 백석의 시 ‘통영 2’가 새겨져 있다. ‘미역 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구절이 유난히 애처롭다.

명정동에서 서피랑 골목을 끼고 강구안으로 가는 항남동 길에도 백석의 애환이 서려 있다. 이곳은 청마 유치환과 김춘수 김상옥, 이중섭과 전혁림 등 시인·화가가 술잔을 기울인 예술의 거리였다. 백석보다 네 살 많은 유치환은 동피랑 쪽 태평동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고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그를 기리는 청마문학관과 생가를 찾아 정량동 망일봉 언덕에 오르니, 아버지가 운영하던 유약국 간판과 빨간 우체통이 눈길을 붙잡는다. 중앙동에는 청마가 짝사랑한 이영도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보낸 우체국이 있고 그 옆에 ‘행복’ 시비가 서 있다.

동피랑 입구에서 청마의 결혼식에 화동으로 들러리를 선 김춘수 시인의 생가터 표지를 발견했다. 골목 안에는 소박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의 유품전시관은 뜻밖에도 통영항 건너편 미륵도의 봉평동에 있었다. 육필원고 126점과 붓글씨, 액자, 사진, 가구, 옷가지 등을 둘러보고 인근의 박경리기념관까지 방문하고 싶었지만 내부공사 중이어서 아쉽게 돌아 나왔다.

통영의 밤바다는 뱃고동처럼 웅웅거리다가 윤슬처럼 반짝인다. 옛날 백석은 ‘오랜 객줏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 묵었는데, 빌라형 펜션 여섯 채로 이뤄진 ‘수국작가촌’에서 남도의 봄밤을 맞으니 호사스럽기 그지없다. 통영항 서쪽 편백숲 끝의 작은 무인도 두 개를 이어 붙인 수국작가촌은 시인들이 ‘한반도 모국의/ 귀여운 볼 사마귀’(유안진),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반짝이고/ 홀로 깨어 있는 섬’(이근배)이라고 노래한 곳이다.

바다와 맞닿은 산책로를 걷다 보니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봄비가 내리듯 ‘굴 냄새 나는’ 해무가 수면 위로 번진다. 잔디 정원 곁으로 잘브락거리는 물소리가 들리고, 가끔 사량도와 두미도로 가는 뱃소리도 들린다. 이곳에선 바다의 풍광과 섬의 아취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봄이 오는 소리는 귀와 눈을 자극하고 잠자던 미각을 일깨운다.

통영에서 지금 가장 입맛을 돋우는 음식은 도다리쑥국이다. 산란을 끝내고 살이 오르기 시작하는 봄 도다리의 담백한 맛과 언 땅을 뚫고 올라온 햇쑥의 향긋한 풍미가 일품이다. 현지인이 꼽은 맛집에 들렀더니 흰 도다리살과 파릇한 쑥의 자태가 눈을 사로잡는다. 싱그러운 향미가 코를 자극하고, 바다와 들판의 미감이 혀를 휘감는다. 어린 날 추억이 가슴을 어루만지고, 뽀얀 김이 온몸을 감싼다. 그래서 도다리쑥국 맛은 한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라고 해야 어울린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나는 것들도다리는 쇠한 기운을 북돋고, 갓 뜯은 쑥은 피를 맑게 한다. 쑥에는 비타민 A와 C, 철분이 많아 혈액 순환을 돕고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 ‘7년 앓은 병 3년 묵은 쑥 먹고 고쳤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통영 사람은 한산도 욕지도 등 섬에서 자란 노지 쑥으로 국을 끓인다. 그만큼 향과 맛이 뛰어나다.

또 다른 별미는 장어시락국이다. 장어뼈를 푹 고아낸 육수에 시래기를 넣고 오래 끓인 진국이다. 여기에 산초(제피)와 김 가루, 잘게 썬 고추와 부추무침을 취향대로 곁들인다. 서호시장에서 맛본 돌장어시락국이 너무 맛있어 매일 아침 단골이 됐다. 시락국과 함께 먹는 멍게비빔밥도 ‘엄지척’이다. 멍게와 통깨, 김 가루, 참기름만 넣고 밥알이 눌리지 않게 젓가락으로 삭삭 비벼야 제맛이 난다.

통영의 봄을 완성하는 것은 음악이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오는 27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열흘간 클래식 전용 공연장 통영국제음악당에서 펼쳐진다. 개막공연 ‘통영 페스티벌오케스트라Ⅰ’과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은 매진됐지만 조성진은 30일 공연에서 바흐 파르티타 1번, 쇤베르크 피아노 모음곡 등을 선사한다. 모레(20일)부터는 87개 팀의 ‘통영 프린지’ 축제도 이어진다. ‘깊이를 마주하다’라는 올해 음악제 주제처럼 영혼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감동의 선율을 만날 수 있다. 음악당에서 가까운 봉수골 벚꽃길의 전혁림미술관에서 ‘한국의 피카소’ 전혁림 작품까지 감상한다면 금상첨화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문학과 예술의 빛은 더욱 밝아진다. 마음속에 숨겨둔 미완의 결핍과 아쉬운 일, 못다 한 이야기를 보듬고 이 봄날 시와 음악, 미술과 미각의 향연으로 나를 살찌우자. 남녘 항구의 아름다운 봄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는 동안 어느새 나도 시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고 천하제일 미식의 주인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