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용 PC에 3700여 개의 음란물을 보관하고 근무시간 중 관련 블로그 활동을 해온 18년 차 중견 간부에 대해 '해고는 정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개인의 성적 취향은 존중받아야하지만 공적 자산인 업무용 PC를 사적으로 오용하고 건전한 조직 문화를 저해한 행위는 고용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중대한 비위라고 판단했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은 최근 A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구제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이 같이 판단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1심을 뒤집었다.
○평범한 부장님의 '사생활’...9년간 3000개의 비밀 저장
A씨는 공직 유관단체이자 비영리 특수법인인 B협회에서 18년 넘게 근무하며 3급 부장까지 승진한 베테랑 직원이었다. 대정부 업무를 수행하며 장관 표창을 받을 정도로 대외적인 성과도 훌륭했다.
하지만 2023년 7월 A씨가 음란물과 관련된 사진과 글을 공개 사이트에 올린다는 동료의 익명 제보가 들어왔다. 회사의 조사 결과 A씨는 2015년부터 자신의 독특한 성적 취향 관련 자료들을 회사 PC에 차곡차곡 모은 것이 드러났다. 정리한 폴더명도 성적 행위를 묘사하는 적나라한 수준이었다. 이 회사의 문서중앙화 시스템 탓에 A씨가 PC '개인 문서함'에 저장된 파일들은 회사 중앙 서버에 저장돼 관리되면서 이 사실이 밝혀졌다.
A씨는 익명 제보대로 근무시간 중에도 자신이 운영하는 음란물 사이트에 수차례 접속해 게시물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회사는 9월 징계위를 열어 △선정적인 자료를 회사 PC에 지속적 수집·저장 △근무시간 중 커뮤니티 활동을 통한 근무 태만 △고위직으로서 품위 훼손 등을 이유로 A씨를 해임했다. A씨는 이에 불복해 노동위에 구제신청을 했으나 기각되자 노동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
1심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음란물 저장 행위에 대해선 협회 인사 규정상 징계시효는 3년이었으므로 그 전에 저장한 자료나 접속 기록은 징계 사유가 안된다고 봤다. 또 A씨가 업무 시간 중 사이트에 접속한 일수가 수년간 10회를 조금 넘는 것에 그쳤고 게시글이 43개에 불과한 점을 들어 "근무시간 중 근무를 태만히 했다고 볼 수 없다"고 봤다.
○항소심 “사생활 존중하지만 징계 사유” 1심 뒤집어
하지만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개인의 성적 사생활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면서도 A씨의 행위가 징계 대상이라고 봤다.
먼저 징계시효에 대해 "파일을 삭제하지 않는 이상 업무용 PC 및 문서중앙화 서버에 계속 보관됨으로써 회사의 자산을 부당하게 사용·점유하고 있는 상태는 계속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파일을 삭제하지 않는 한 징계 사유가 매일 새로 발생하는 것이므로 시효가 기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장 행위 자체도 징계 사유가 된다는 취지로 봤다. 재판부는 업무용 PC는 직무상 정당한 용도로만 사용해야 하며, 업무 외 용도 사용은 가급적 자제해야 한다"며 "장기간에 걸쳐 (음란물 파일을) 회사 PC에 보관한 것은 회사의 자산을 사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고의 행위"라고 지적했다. 또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성적 취향 자료들은 공적 근무 장소에 노출되거나 보관되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며 "관련 모임서 촬영한 사진을 다운 받아 폴더별로 분류하는 등의 행위는 자신의 성적 취향과 관련된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비위의 정도가 가볍지 않다"고 꼬집었다.
근무시간 중 업무 태만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핸드폰 등을 사용해 접속한 사실을 포함한다면 업무 시간에 사적 활동을 한 횟수는 더 많을 것"이라며 "단순히 기간 대비 비위행위의 횟수가 적다는 사정만으로 비위가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특히 A씨가 공개 사이트에 성적 취향의 사진을 올린 행위 자체를 문제삼았다. 법원은 "A씨의 게시물들이 형법상 음란물에 해당되지는 않더라도 일반인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거나 혐오감을 주기 충분하다"며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공개 사이트에 자신의 성적 사생활을 노출시켜 다른 직원들에게 드러나, 건전한 근무 환경을 조성할 회사의 의무를 저해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부 동료 직원들이 "A씨 복귀 시 조직문화가 저해될 수 있다"며 탄원서를 낸 점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이번 판결은 직장 내 업무용 디지털 자산의 사적 이용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는 평이다. 정상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디지털 데이터의 보관 자체를 '계속되는 비위'로 간주해 징계시효를 폭넓게 인정한 사례"라며 "근로계약상 성실의 의무가 디지털 공간에서도 적용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업무용 차량 등 회사 실물 자산의 오남용 수준에 미치지는 않더라도, 업무용 디지털 자산을 개인적 취미나 사생활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행위가 커리어 전체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