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허술한 감시망에 구멍 뚫린 방산 공급망

입력 2026-03-15 17:28
수정 2026-03-16 00:22
“앞으로 첨단산업의 핵심 인재·기술 유출은 계속될 겁니다.”

배터리 장비의 러시아 불법 수출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업계 관계자들은 “수출 감시망이 허술하다”고 입을 모았다. 불법 수출 혐의로 관세청의 압수수색을 받은 배터리 장비 업체는 늘어나고 있다. 취재 결과 이들 중 한 곳은 러시아 수출을 감추기 위해 허위 공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업체가 전쟁 물자로 전용될 수 있는 제품을 러시아에 수출한 가장 큰 이유는 자금난으로 추정됐다. 2020년 이후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확산하고 중국산 배터리의 공세가 거세지자 러시아가 매력적인 수출 시장으로 부상했다. 러시아 업체들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발발 후 미국, 유럽 등의 제재가 거세지자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업체를 향해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방산 관련 제품의 러시아 수출 규제를 단계적으로 강화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는 “정부 감시망이 촘촘하지 않다”며 “생존을 걱정해야 할 상황과 비교하면 규제 위반에 따른 제재 강도는 위협적이지 않다”고 털어놨다.

일부 기업은 제조업체 이름과 제품 시리얼 넘버를 지우고 원산지 증명서 관세 대장을 기재하지 않는 등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제3국으로 우회 수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수출 대금 회수도 4~5단계 자금 세탁 과정을 거치면서 정부 감시망을 피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배터리뿐 아니라 반도체, 인공지능(AI), 로봇, 조선 등 다른 첨단산업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1위 경쟁력을 보유한 메모리 반도체업계에선 핵심 인력과 기술 유출에 따른 피해가 현실화하고 있다. 핵심 기술 해외 유출로 인한 피해는 업계 전반에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 당장 국내 배터리 대기업들은 이번 불법 수출 혐의를 받는 협력사를 일일이 파악해 제조 생태계를 다시 구축해야 하는 ‘공급망 리스크’에 직면했다. 업계 관계자는 “민관이 인력과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도 개선 역시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기업도 내부 통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압수수색을 받은 일부 기업 경영진은 “불법 수출이 발각되면 한국 정부뿐 아니라 미국 정부의 제재도 받을 수 있다”는 내부 경고를 외면하고 수출을 감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내부 목소리가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되고, 관련 당국에 전달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핵심 기술과 인력 유출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