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남산의 힐튼호텔은 결국 문을 닫았다.
대칭을 이루는 아름다운 계단과 고풍스러운 브론즈 기둥, 호텔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천창에서 떨어지는 우아한 빛이 방문객을 조용히 감싼다.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제자인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호텔이다. 그는 스승의 건축사무실에서 12년을 함께 일하며 배운 것들을 서울의 땅 위에 새겨 넣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내고, 오직 비례와 빛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 힐튼호텔은 그의 대표작이다.
우리가 힐튼호텔을 기억하는 이유가 천창의 빛과 아름다운 계단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공간이 가진 고요함과 품위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씩 사라져가는 힐튼호텔을 바라보며,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을 떠올렸다. 이 영화 역시 한 호텔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네 겹의 시간으로 이뤄져 있다. 한 소녀가 묘지에서 작가를 추모하고, 그 작가는 자신이 젊은 시절 방문한 한 호텔의 노인(제로)을 추억하고, 그 노인은 구스타브와의 일화를 회고하며 그리움을 드러낸다. 소녀에서 작가로, 작가에서 제로로, 제로에서 구스타브로 기억이 기억을 끌어내는 구조다. 이 구조로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미 지나간 것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선언한다.
산 위에 당당히 선 분홍빛 호텔. 누구나 한 번쯤 묵고 싶은 그곳,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이다. 그러나 곧바로 36년 뒤의 모습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이제는 몇몇 단골만 찾을 뿐인 쇠락한 호텔을 방문한 작가는 손님 한 명 없는 로비에 홀로 앉은 노인 제로에게 말을 건다. 제로는 젊은 작가의 관심이 반가웠는지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성기의 호텔은 외벽이 분홍빛이었고, 설산에 잘 어울렸다. 파란 지붕과 아치형 창문이 빼곡히 늘어선 파사드는 두 팔 벌려 손님을 환대한다. 이 건물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런 곳이 존재할까 싶을 만큼. 호텔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은 컨시어지 구스타브다. 신입 로비 보이인 제로가 그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호텔의 이것저것을 배워나간다.
갑작스레 전쟁이 시작된다. 분홍빛 화사한 호텔은 회색 군복을 입은 군인으로 채워졌다. 새로운 세계가 구스타브의 세계를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결국 군인에게 죽임을 당한다. 구스타브가 살아생전 약속한 대로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을 포함해 그의 모든 재산은 제로에게 돌아갔다. 이제는 그가 호텔을 이어가게 됐다.
제로는 상속받은 모든 재산 중에서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하나만큼은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전후에 들어선 새로운 권력이 부유층의 재산을 하나씩 강탈해가는 와중에도, 다른 모든 재산을 헌납하며 적자투성이 낡은 호텔만은 끝까지 지켜냈다.
사실 나는 힐튼호텔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 호텔을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영화 속 작가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 속 작가는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의 전성기를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제로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그 호텔의 기억을 남겼다. 아마 나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미스 반데어로에는 지나가버린 시대의 건축가지만, 그가 남긴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고 기품 있다. 건축가 김종성은 스승의 건축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방식으로 서울에 힐튼호텔을 지었다. 여러분도 힐튼호텔을 한 번쯤 생각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