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이미지 편집 도구 ‘어도비 포토샵’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패키지 형태로 팔렸다. 이용자는 박스에 담긴 CD를 개인용 컴퓨터(PC)에 설치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었다. 시중에 처음 판매된 포토샵1.0의 가격은 895달러.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2000달러를 웃도는 고가였다. 업무용으로 쓰는 전문가가 아니면 선뜻 써보기도 어려웠다. 2007년 어도비의 지휘봉을 잡은 샨타누 나라옌은 높은 진입 장벽이 문제라고 봤다. 그는 포토샵 요금체계를 월 20~70달러 내는 클라우드 기반 구독제로 바꾸며 사용자 기반을 크게 넓혔다.
이처럼 어도비를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기업으로 전환한 주역 나라옌 최고경영자(CEO)가 18년 만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테크 전문매체 디인포메이션은 “인공지능(AI)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기업이 경영진 개편에 나선 상징적인 사례”라고 분석했다. 'AI 공포'에 주가 40% 하락나라옌 CEO는 12일(현지시간) “향후 수개월간 이사회와 협력해 후임자를 선정하고 원활한 인수인계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애플·실리콘그래픽스 등을 거친 나라옌 CEO는 1988년 부사장으로 어도비에 합류했다. 2007년 전임자 브루스 치젠의 뒤를 이어 18년간 회사를 이끌며 직원 수를 10배(3만 명)로 늘렸고 연 매출을 10억달러에서 250억달러로 키웠다.
그는 사임 소회를 밝히며 “새로운 시장 카테고리를 창출하는 리더십과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자세가 어도비의 매력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성장의 주역인 그가 돌연 사임을 결정한 배경에는 ‘사스포칼립스(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종말론)’로 불리는 위기론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어도비는 구글 나노바나나와 미드저니 등 생성 AI 도구, 피그마·캔바 등 AI 네이티브 편집 툴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며 ‘구세대 소프트웨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같은 우려가 반영되면서 어도비 주가는 지난 1년간 38.49% 급락했다.
어도비는 자체 생성AI 도구 ‘파이어플라이’를 자사 제품군에 이식하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실제 이날 발표된 2026회계연도 1분기(2025년 12월~2026년 2월) 매출은 전년보다 12% 증가한 63억9000만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특히 AI 기반 제품의 연간 매출은 전년 대비 3배 급증했다. 그럼에도 CEO 교체에 따른 불확실성이 커지며 시간외거래에서 주가는 한때 7% 이상 떨어졌다. 나라옌 CEO는 후임이 확정되기 전까지 직을 유지하고 이후에는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워크데이·클라비요도 리더십 교체 리더십 변화가 어도비만의 일은 아니다. 인사관리 소프트웨어 기업 워크데이는 칼 에센바흐 CEO가 사임하고 공동 창업자인 아닐 부스리가 복귀한다고 지난달 9일 발표했다. 부스리는 2005년 워크데이를 공동 창업해 2014년부터 2020년까지 CEO로, 2020년부터 2024년까지는 공동 CEO로 재직했다.
부스리 CEO는 취임사에서 “AI는 SaaS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차세대 시장 선도 기업을 정의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1990년대 전사자원관리(ERP) 기업의 시초 격인 ‘피플소프트’의 초기 멤버이자 유명 벤처캐피털(VC)인 그레이락의 파트너로서 기술 트렌드를 읽는 안목을 증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케팅 소프트웨어 기업 클라비요는 부스리 CEO와 2020~2022년 워크데이를 함께 이끈 차노 페르난데즈를 공동 CEO로 영입했다. 창업자이자 기존 CEO인 앤드류 비알레키가 AI 제품 등 기술 고도화에 집중하고, 페르난데즈가 경영을 총괄하는 이원 구조다.
마이크로소프트(MS) 역시 지난해 말부터 대대적인 인력 재편에 들어갔다. 사티아 나델라 CEO는 지난해 10월 세일즈 총괄이던 저드슨 알토프를 상업 부문 총괄 CEO에 임명하고 본인은 “기술적 과업에 더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나델라 CEO는 MS의 연례 최대 컨퍼런스인 ‘이그나이트 2025’에도 불참했다. 소프트웨어 기반의 MS를 클라우드 인프라 중심으로 전환한 나델라 CEO가 AI 시대에 맞는 또 한 번의 체질 개선을 준비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실리콘밸리=김인엽 특파원 insi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