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는 최고의 도파민" 뇌과학자 정재승과 피아니스트가 해부한 골드베르크

입력 2026-03-13 13:47
수정 2026-03-13 13:49


음악은 누군가에게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류 역사로 보면, 언어만큼이나 강력한 행복의 원천은 음악이었다. BTS의 수십만 해외 팬들이 서울행 비행기 티켓을 끊고,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팬들이 뉴욕으로 런던으로 원정을 가는 것만 봐도 음악을 향한 팬덤은 유난하다.

20세기만 해도 음악이 주는 행복을 과학적 언어로 설명할 길은 없었다. 막연히 '음악을 들으면 좋다' 정도에 머물렀던 개개인의 내밀한 기쁨은 이제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음악 감상은 뇌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건전한 방식이다. 특히 정교한 구조로 쌓아 올린 클래식 음악은 대중음악과는 또 다른 '지적' 쾌감을 준다.

음악에 얽힌 뇌과학적 관점과 예술의 세계를 동시에 탐구하는 특별한 무대가 있다. 오는 3월 21일 바흐의 탄생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 체임버 홀에서 개최되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공연은 피아니스트 한지호와 뇌과학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함께하는 지적 향연이다. 공연을 앞둔 두 사람과 최근 만났다.

정재승 : 클래식은 뇌를 많이 자극하는 음악



평소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정재승 교수는 음악이 뇌에서 행복을 느끼는 부위인 ‘측좌핵’을 활성화해 도파민을 분출시키는 최고의 도구라고 설명했다.

음악 장르별로 뇌의 자극 정도도 다르다. 그중 클래식 음악은 뇌를 유독 많이 쓰게되는 장르다. 정 교수는 “대중음악에 비해 클래식은 구조가 복잡하고 촘촘해서 내용을 완벽히 파악하기 쉽지 않다"며 "그만큼 뇌를 더 많이 자극하는 음악”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가는 바흐다. 그가 학창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도 글렌 굴드의 전집이었다. 인생 첫 논문 주제 역시 바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바흐의 음악은 수학적으로 완벽한 규칙을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예상치 못한 화성 진행과 예외적인 움직임이 섞여 있어 뇌에 적절한 긴장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준다”고 분석했다.

그중 바흐가 한 백작의 불면증 치료를 위해 작곡했다는 설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사실 '밀당'의 묘미가 있는 곡이다. 유난히 뇌를 많이 자극하는 곡으로, 그동안 '수면을 부르는 음악'으로 불려온 게 억울할 정도다.

아리아로 시작해 30개의 변주를 거쳐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인 이 변주곡은 안정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전한다. 너무 단순해 지루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복잡해서 예민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안정'과 '긴장'의 적당한 균형은 듣는 이들에게 묘한 정서적 만족을 준다.

정 교수는 "뇌과학적으로 보면 음들의 귀환과 안정을 통해 고도의 지적 만족감을 주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음악이 뇌를 자극하는 정도를 MRI 촬영할 때 많이 들려주는 곡 중 하나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바흐는 실제로 골드베르크의 초판 표지에 이렇게 적었다. ‘음악 애호가들의 영혼을 고양하기 위한’이라고. 영적인 종교 경험에서 나올법한 '영혼의 고양'이라는 표현은 바흐의 음악을 말할 때 꼭 등장한다. 정 교수는 "이 곡은 뇌의 특정 영역을 자극하는데, 그 영역들이 종교적 체험시 자극받는 뇌의 영역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h3 data-path-to-node="9">한지호 : 인간 삶의 30가지 모습</h3>이번에 골드베르크를 연주할 피아니스트 한지호는 그만의 바흐 해석으로 주목받아왔다. 뮌헨 ARD 콩쿠르 우승자인 그는 독일 언론으로부터 "글렌 굴드와 빌헬름 켐프 사이의 독보적 위치"라는 평가받았다. 2024년부턴 미국 인디애나 음대에서 피아노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 중이기도 하다.

바흐의 스페셜리스트인 한지호가 해석하는 골드베르크는 어떤 곡일까.

이 곡은 음악가들에게 잘해봐야 본전,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난곡(難曲)'으로 꼽힌다. 바흐로만 90분을 채워야 하는 것 자체가 도전인 곡이다. 그는 "정통의 연주도, 자유롭게 개성을 표출하기도 쉽지 않다. 나만의 해석을 하는 것 자체가 연주자에겐 도전인 곡"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불과 21세였던 임윤찬이 골드베르크로 리사이틀을 돌자,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평생 피아노와 함께한 거장도 어려워하는 곡이 바흐의 골드베르크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바흐의 음악 속에 숨겨진 ‘드라마틱한 파격’에 주목한다. 장조의 곡이 나올 차례인데 단조 의 변주곡이 등장하는 식이다. 음악적으로 보면, 마치 마법을 부리는 것 같은 전개다. 그는 "바흐는 대위법을 떠올리면 분석이 쉬울 것 같지만, 사실 이론적으로 보면 늘 예외적인 움직임과 생각지 못한 화성 진행이 있다"고 설명했다. 바흐가 설계한 수학적 규칙과 예상밖의 변화가 적당히 섞인 구조는 음악가에게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목이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곡은 25번 변주곡이다. "25번은 쇤베르크의 현대음악 같은, 분석이 안 될 정도로 예상치 못한 음들이 쏟아져요. 그럴 땐 길을 잃었다가 또 세계가 무한히 확장되는 느낌을 받죠."

한지호는 골드베르크를 ‘인간 삶의 30가지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는 "바흐가 수학적으로 어렵고 여러 성부 때문에 어려운 느낌이 있지만, 인간의 30개 모습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 사람의 서른 가지 이야기를 연결해 들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인위적인 해석보다는 곡 자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음들의 순환과 귀환을 관객과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

‘골드베르크의 질문들’



두 사람의 인연은 3년전 홍콩에서 만남으로 시작됐다. 당시 한지호의 연습 연주(런스루)를 우연히 듣게 된 정 교수가 '바흐'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고, 흥미로운 관점을 확인한 두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이번 기획이 탄생했다.

연주 후 이어지는 대담은 이번 공연에서 또다른 재미를 줄 예정이다. 정 교수가 모더레이터로 참여해 한지호와 함께 바흐의 골드베르크를 논한다.

AI가 인간의 경험을 대체하려 들지만, 실재하는 음악가의 연주와 이를 같은 공간에서 함께 듣고 느끼는 '감상'은 앞으로 더 귀한 경험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스마트폰으로 예술을 쉽게 소비하는 시대일수록, 직접 공연장을 찾아 현장의 아우라를 느끼며 예술가와 호흡하는 것은 의미 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감정의 요동을 경험하는 행위는 우리 뇌를 가장 건강하고 적극적으로 깨우는 소중한 미적 체험이 되거든요."(정재승)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