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 장기화로 인한 운임 급등과 노후 선박 교체 수요가 겹치면서 중고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가격이 새 선박 값을 앞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선박 시장 최고 호황기이던 2008년 이후 18년 만에 처음이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VLCC 60여 척의 발이 묶여 있는 데다 이란의 잇단 공격으로 유조선이 피해를 보고 있어 중고 선박 가격 역전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중고 선박이 150억원 더 비싸
12일 영국의 조선·해운 시황 분석 업체 클라크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6일 기준 30만t급 5년 차 중고 VLCC 가격은 1억4000만달러(약 2000억원)로 지난달 말 1억3800만달러보다 200만달러 상승했다. 같은 날 기준 동일 규모 새 선박 계약 가격(1억2850만달러)보다 8.9% 높은 금액이다. 중고 선박과 새 선박 가격 차이는 1150만달러로 관련 통계를 집계한 이후 최대치로 벌어졌다. 중고 VLCC 가격은 작년 2월 1억1200만달러에서 1년 만에 25.0%(2800만달러)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새 배를 주문하면 3년 이상 걸리는 탓에 진수를 앞둔 새 VLCC를 500억~600억원 웃돈을 주고 가져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중고 선박 가격이 치솟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 이후 VLCC 운임이 급등했다. 이달 둘째 주 30만t급 VLCC의 하루 운임은 42만3736달러로 전주 20만9550달러보다 102.2% 올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란의 기뢰 설치 등으로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게 당분간 어려울 것이란 판단에 미국 등에서 원유를 들여오려는 정유사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작년 10월 둘째 주에 같은 선박의 하루 용선료가 6만8146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5개월 만에 여섯 배 올랐다. ◇유조선 발주 감소한 것도 영향최근 몇 년간 유조선 발주가 주춤했던 점도 중고선 가격 상승을 부추겼다. 당초 선사들은 바다에서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 규제가 강화되고, 석유 사용이 줄어들면서 유조선 수요도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세계 석유 사용량은 꾸준히 증가하는 데다 전체의 40%가 넘는 20년 이상 된 유조선 교체로 수요가 다시 늘고 있다.
이제 와서 VLCC를 빠르게 늘릴 수 없는 점도 문제다. 한국 조선 3사(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는 고부가가치 선박인 액화천연가스(LNG)선 등 친환경 선박으로 독(dock·선박건조장)을 꽉 채운 상황이다. VLCC는 길이 300m, 폭 50m 이상의 독과 깊은 수심, 골리앗 크레인을 보유한 대형 조선사만 건조할 수 있다. 최근 중국 조선사들이 VLCC 신규 수주를 늘리고 있지만 미국 정부의 제재 등으로 완벽한 대체재가 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작년부터 친환경 선박 수요가 주춤해진 상황에서 국내 조선사들이 고수익 선박 중심으로 선별 수주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VLCC 품귀에 이보다 규모가 작은 15만8000t급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5년 차 중고 선박 가격은 6일 기준 8800만달러로 새 선박(8750만달러)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12만~16만t 규모의 수에즈막스는 VLCC보다 적재량이 적다. 그 대신 최소 40m 깊이의 항만을 확보해야 하는 VLCC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원유를 조달할 수 있다. 평균 수심이 20m대로 얕은 멕시코만 연안 미국 항구 사용에 유리하다는 의미다. 중동 대신 미국에서 원유를 수입하려는 수요가 늘면서 수에즈막스급 선박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우섭/김진원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