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의 본고장 핀란드. 지난달 눈이 소복이 쌓인 수도 헬싱키 항구 근처에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우나 문을 열고 나온 이들이 너도나도 얼음 수북한 바다에 몸을 던졌다. 핀란드 사람들에겐 이 장면이 겨울을 보내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조각이다.
핀란드 사우나의 기원은 약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척박한 북유럽의 극단적인 추위 속에서 사우나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성소(聖所)’였다. 초기 사우나는 땅을 파서 만든 구덩이에 뜨겁게 달군 돌을 넣고 그 위에 물을 부어 열기를 유지하는 형태였다.
이 공간은 핀란드인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였다. 과거 사우나는 집안에서 가장 청결한 장소였기에 아이가 태어나는 산실(産室)이 됐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병원이자 죽은 자를 배웅하는 장례식장이 되기도 했다. 핀란드인은 뜨거운 돌 위에 물을 부을 때 솟아오르는 증기를 ‘뢰일리(Loeyly)’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대 핀란드어로 ‘생명력’ 또는 ‘정신’을 의미한다. 증기에 깃든 자연의 숨결이 인간의 영혼과 연결된다고 믿어온 것이다.
핀란드에서 사우나는 특별한 휴식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다. 우리가 매일 식탁에 김치를 올리듯, 사우나는 이들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의 호텔은 물론이고 일반 가정집도 사우나를 갖추고 있을 정도다. 도심에서 마주친 많은 현지인이 핀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힌 이유 중 하나로 사우나 문화를 언급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사우나 문화는 핀란드를 넘어 아시아에서도 새로운 웰니스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에선 ‘디지털 디톡스’를 원하는 MZ세대가 사우나에 열광하고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대중탕에 삼삼오오 모여 시간을 보내는 취미로 인식되던 건 옛말이다. 요즘 속속 등장하는 프라이빗 사우나는 사우나, 냉수욕(또는 샤워), 휴식으로 이어지는 간단한 루틴을 반복하게 한다.
꼭 정해진 사이클을 따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일이다. 스스로 편안함을 느끼는 시간과 속도대로 몸을 회복하는 과정은 그 어떤 활동보다 매력적이다. 수많은 쇼츠와 피곤한 알고리즘의 강요를 잠시 등지고, 이번 주말엔 나만의 루틴대로 사우나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뜨거운 증기에 심신을 오롯이 맡겼다가 문을 나서는 순간 세상이 좀 더 선명해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될 테니.
땀 흘린후 얼음 호수에 '풍덩'…핀란드선 사우나서 끈기 배워
핀란드인의 삶과 깊이 연결된 사우나“핀란드 사람들은 사우나 안에서 뜨겁게 달궈진 돌 사이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요.”
지난달 25일 핀란드 북부 로바니에미 노르바예르비 호수 인근 스카이라(SKYRA)에서 만난 사우나 전문 가이드 민나 홀름이 들려준 얘기다. 그는 신성한 의식을 하듯 달아오른 돌 위에 조심스레 물을 끼얹었다. 핀란드 전통 사우나는 공기를 직접 데우는 것이 아니라 돌로 공간 전체를 따뜻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돌은 열을 오래 저장했다가 물을 부었을 때 강한 증기를 만들어 낸다. 고온에 강한 올리빈 등 광물이 핀란드의 주요 수출품인 이유다. 이곳에서 체험한 사우나는 거대한 산업이자 시대를 거슬러 온 문화 코드 그 자체였다.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공간
핀란드에선 돌 위에 물을 부으면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뜨거운 증기를 ‘뢰일리(Loeyly)’라고 부른다. 이 단어의 어원은 ‘영혼’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증기를 통해 인간이 자연의 영혼과 연결되고 그들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믿음은 핀란드 사우나 특유의 ‘침묵 문화’로 이어졌다. 핀란드인은 사우나 안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떠들지 않는다. 이 영혼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사우나는 핀란드 역사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과거 위생시설이 부족하던 때 사우나는 집에서 가장 깨끗한 장소로 통했다. 홀름은 “출산할 때 사우나를 이용하기도 했다”며 “로바니에미에서 80년 전만 해도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고 했다. 사우나는 병든 이를 돌보는 곳이기도 했고, 조용히 생을 마무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몸을 치유하는 공간이자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사우나는 목욕시설을 넘어 핀란드 사람들의 삶과 깊이 연결된 문화였다. 이 같은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핀란드에는 약 550만 명의 인구에 300만 개가 넘는 사우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호텔과 공공시설은 물론 일반 가정집에도 사우나가 있을 정도다. 조용한 강인함, 핀란드의 정신 ‘시수’
북극권에 가까운 로바니에미에서 체험한 사우나는 더욱 강렬했다. 얼음물에 몸을 담그는 ‘콜드 플런지’도 경험할 수 있었다. 뜨거운 사우나에서 20분가량 땀을 흘린 뒤 얼어붙은 호수 안으로 들어가자 숨이 멎을 듯 온몸이 차가워지며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우나 안에서는 ‘비타(vihta)’라는 자작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다발로 몸을 가볍게 두드리는 전통도 체험했다. 혈액순환을 돕고 피부를 자극하는 자연 마사지다. 사우나 안에 퍼지는 자작나무 향은 마치 숲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혹독한 겨울과 긴 어둠을 견뎌야 하는 북유럽 환경 속에서 사우나는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단련하는 공간이다. 뜨거운 열기에 땀을 빼고,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며 다시 사우나로 돌아오는 반복적인 과정은 자연스럽게 인내와 균형의 감각을 길러준다. 핀란드의 민족정신으로 알려진 ‘시수(sisu)’ 역시 사우나 문화와 연결 지어 설명되곤 한다. 시수는 흔히 ‘은근한 끈기’ ‘조용한 강인함’으로 번역된다.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책임을 다하는 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삶을 이어가는 내적 회복력을 의미한다.
핀란드는 지난해까지 유엔이 꼽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8년 연속 선정됐다. 핀란드 국적항공사인 핀에어의 투르카 쿠시스토 최고경영자(CEO)는 기자와 만나 “핀란드 사람들에게 행복은 화려한 것이 아니다”며 “신뢰와 안전, 평등 같은 소박한 가치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뜨거운 사우나 안에서 조용히 땀을 흘리고, 잠시 침묵 속에 자신을 돌아본 뒤 일상으로 돌아가는 시간.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핀란드 사람은 삶의 균형을 찾는다.
헬싱키·로바니에미=신정은/정소람 기자/김현주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