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민의 ‘볼레로’ 너머 현대 발레의 신화가 펼쳐진다

입력 2026-03-12 13:56
수정 2026-03-12 15:07
현대 발레의 지형을 바꾼 전설적인 무용단, 베자르 발레 로잔(BBL)이 25년 만에 서울 무대에 오른다. 오는 4월 23일부터 26일까지 GS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내한 공연은 세계 최정상 무용수 김기민의 합류로 일찌감치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그저 스타 무용수의 티켓 파워에 기대는 공연이 아니다. 김기민이 주역으로 서는 '볼레로'를 정점으로, 현대 발레의 살아있는 유산과 동시대 안무가들의 실험적인 시선이 담긴 다채로운 레퍼토리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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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볼레로'는 모리스 베자르 예술 세계의 정수로 꼽힌다. 모리스 라벨의 반복적인 음악 구조를 무대 위 시각적 에너지로 치환한 이 작품은 중앙의 붉은 원형 탁자 위에서 춤추는 주역 무용수가 '선율'(라 멜로디)이 되고, 그를 둘러싼 남성 군무진이 '리듬'이 되어 거대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기민은 한국인 최초로 이 역사적인 무대의 주인공인 '멜로디'를 맡아 절정으로 치닫는 육체적 해방감을 선사할 예정이다.



'볼레로'가 관능적이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는다면 함께 공연되는 '불새'는 혁명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전통적인 발레의 동화적 서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베자르는 여기서 불새를 단순한 환상의 존재가 아닌 자유를 향해 투쟁하는 전사이자 끊임없이 재탄생하는 혁명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붉은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역동적인 움직임은 죽음을 넘어선 생명력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웅변한다.



아시아 초연으로 공개되는 신작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안무가 발렌티나 투르쿠의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압축했다. 인간 내면의 심연과 실존적 고뇌를 다루는 이 작품은 BBL 무용수들의 뛰어난 표현력을 통해 고전이 어떻게 동시대적인 설득력을 얻는지 보여준다.

또 다른 초연작인 요스트 브라우엔라에츠의 '바이 바이 베이비 블랙버드'는 전설적인 미국 가수 조니 캐시의 절제된 음악을 배경으로 삼는다. 매일 아침 찾아오던 새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상실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이 무대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존재의 여운과 기억을 시적으로 그려내며 관객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주목해야 할 숨은 보석은 티켓 오픈 한달 뒤인 지난 13일 전격적으로 추가된 '라 루나'다. 1984년 생전의 모리스 베자르가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무용수 루치아나 사비냐노를 위해 안무한 이 작품은 8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발레의 순수한 미학을 집약해 보여준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음악과 함께 밤하늘의 달빛 아래서 춤추는 듯한 무용수의 실루엣은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과거 '발레의 여신' 실비 길렘이 즐겨 추며 베자르 레퍼토리 중 가장 상징적인 솔로 피스로 자리 잡은 이 작품이 뒤늦게 합류한 건 이번 내한 공연의 예술적 밀도를 완성하겠다는 무용단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이번 BBL의 서울 공연은 거장의 유산과 새로운 흐름, 그리고 세계적인 무용수의 기량이 한데 어우러지는 보기 드문 기회다. '볼레로'의 열광적인 피날레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고전을 비틀고 현대적 고독을 위로하는 다양한 몸짓을 마주하며 현대 발레가 지닌 진정한 가치를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