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 전쟁 발발 이후 액화천연가스(LNG)를 실은 선박이 잇따라 해상에서 목적지를 유럽에서 아시아로 바꾸고 있다. LNG 공급 불안 확대에 따라 중동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에서 LNG 가격이 급등한 영향이다. 유럽으로 향할 예정이던 미국산 LNG 등이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아시아로 향하는 모습이다.
LNG 재고가 떨어진 유럽도 매입가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쟁탈전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LNG는 화력발전의 주요 연료인 만큼 가격이 오르면 전기요금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11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글로벌 조사업체 케플러의 선박 추적 정보에 따르면 지난 6일 미국 텍사스주를 떠나 네덜란드로 향하던 LNG 선박 한 척이 대서양 해상에서 남진하기 시작해 일본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가타야마 쓰요시 케플러 수석애널리스트는 “중동 정세가 긴박해지면서 최소 7~8척이 항로를 변경했다”고 말했다.
유럽행 선박이 잇따라 아시아로 항로를 변경하는 것은 두 시장 간 LNG 가격 차이가 벌어져서다. 계약상 행선지에 제약이 없는 미국산과 나이지리아산 LNG를 중심으로 더 높은 가격이 형성되는 지역으로 배를 돌리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미국 S&P글로벌에너지에 따르면 아시아 LNG 가격 지표(JKM)는 4월물이 9일 기준 100만BTU당 24.8달러다. 중동 정세 악화 전인 지난달 27일보다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반면 유럽에선 20~21달러 수준이다. 아시아가 4달러 정도 더 비싼 셈이다.
중동에서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LNG 수출량은 연간 약 8600만?으로 90%가 아시아행이다. 수입량이 가장 많은 곳은 중국으로 연간 약 2000만?이다. 다만 중국은 자국 내 생산과 파이프라인을 통한 수입 등 선택지가 많다.
더 어려운 곳은 대만과 한국이다. 연간 약 820만?을 수입하는 대만은 중동 의존도가 34%에 달한다. 한국도 740만?(15%) 정도 수입하고 있다. 일본의 수입량은 연간 410만?으로 중동 의존도는 6%에 그친다. 다만 일본은 올해 원자력발전소 정기 점검이 많이 예정돼 있어 LNG를 사용하는 화력발전 가동이 늘어날 전망이다.
아시아에 LNG를 뺏긴 유럽에서는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가스인프라스트럭처유럽(GIE)에 따르면 지난 8일 기준 재고 수준은 유럽연합(EU) 전체 회원국에서 저장 용량의 30%를 밑돌았다. 2022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마쓰오 고 에너지경제사회연구소 대표는 “유럽은 결국 LNG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다”며 “아시아와 쟁탈전이 벌어지면 두 지역 모두 가격 상승 압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LNG 확보 경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유럽으로 공급되는 러시아산 LNG 물량이 급감하자 유럽과 아시아가 물량 확보 경쟁을 벌인 바 있다.
도쿄=김일규 특파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