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자 정부가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라는 전례 없이 강한 처방을 꺼내 들었다. 유류세를 추가 인하하고 석유제품 수출을 통제하는 방안도 저울질하고 있다. 당장 이번주 석유제품 최고가격을 고시한다는 방침이다.◇ “최고가격제 신속히 도입하라”이재명 대통령은 9일 청와대에서 비상경제점검회의를 주재하며 “최고가격제 시행을 속도감 있게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서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다는 게 정부 인식이다.
이에 산업통상부는 이번주 석유사업법 23조에 근거해 가격 최고액을 지정·고시할 전망이다. 최고가격제는 도매가 혹은 소매가에 적용하는 두 가지 방안이 가능한데, 정부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넘기는 공급가에 상한을 설정하는 방식을 택할 것으로 보인다. 정유사 마진을 제한하는 조치다.
김윤경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까지는 정유사가 국제 시세와 연동해 마진을 붙였지만, 최고가격제가 도입되면 정부가 정한 기준치 이상으로 공급가를 올릴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정유사에 손실이 발생하면 정부 재정으로 이를 보전하는 방안도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날 “최고가격제 산식, 어떤 경우에 (손실을) 보전해줄지, 재정 소요는 얼마나 되는지를 시뮬레이션했다”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는 휘발유·등유·경유 등 ‘유종’과 북해, 두바이, 미국 등 원유 도입 ‘지역별’로 원가를 정하고 2주 단위로 가격을 게시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제 유가 움직임을 무시하면 사재기와 가수요 등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휘발유값 L당 250원 인하 효과이 대통령은 이날 관련 부처에 유류세 추가 인하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전날까지 유류세 인하에 소극적이었지만, 이날 국제 유가가 100달러 이상으로 오르는 등 상승세가 심상치 않자 기류가 바뀌었다.
정부는 현재 유류세를 7% 인하해주고 있다. 인하 폭을 법적 최대한도인 30%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교통세와 연동된 주행세와 교육세도 낮아져 실질적으로 37%의 인하 효과가 생긴다.
유류세 7% 인하를 감안한 휘발유 세금은 L당 763원 수준이다. 현재 휘발유값을 기준으로 유류세를 최대 폭 인하할 경우 소비자가를 L당 최대 250원 낮출 수 있다. 여기에 최고가격제 도입에 따른 정유사 마진 축소 등을 감안하면 휘발유값 기준으로 L당 300원가량을 내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법정 최대한도로 유류세를 깎아준 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유가가 고공 행진한 2022년 7월부터 5개월간이 마지막이다.
최고가격제 도입 시 정유사 손실을 어떻게 보전해줄지도 관심을 끈다. 추후 국제 유가가 내려갈 때 정유사가 손실을 충당할 만큼 마진을 붙여 공급해도 정부가 용인하는 방식을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면 재정 투입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관건은 전쟁이 얼마나 장기화할지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정유사들이 ‘국제 유가 100달러’가 지속됐을 때 손실 없이 공급할 수 있는 휘발유 도매가는 L당 1900원 안팎이고, 이때 소비자가는 2100원 수준”이라며 “유가와 환율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휘발유 가격을 예컨대 L당 2000원 밑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결국 상당한 정부 재정이 소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대훈/김익환/김리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