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고액 월세' 바람이 서울의 대표적인 서민 주거지이자 신혼부부들의 선호 주거 구역인 노원구와 성북구까지 덮치고 있습니다. 강남권에서나 볼 법했던 월 300만원 이상의 월세 계약이 속출하면서, 직장인 월급에 육박하는 주거 비용이 임대차 시장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 잡는 모양새입니다.
9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노원구 상계동에 있는 '상계중앙하이츠2차' 전용 134㎡는 지난 1월 보증금 8000만원에 월세 300만원으로 새로운 세입자를 들였습니다.
전통적인 학군지로 꼽히는 중계동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대림벽산' 전용 114㎡는 지난 2월 보증금 1억5000만원에 월세 300만원으로 월세 계약을 새로 했습니다. 이외에도 올해 들어 노원구에서만 200만원이 넘는 월세 계약이 9건 체결됐습니다.
노원구가 지금껏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세금으로 '내 집 마련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것을 고려하면 격세지감입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한 달 꼬박 일해 번 소득의 상당 부분을 고스란히 집주인에게 내어주는 상황이 현실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북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성북구의 대장 아파트 중 하나로 꼽히는 '래미안길음센터피스' 전용 84㎡는 지난 1월 보증금 5000만원에 300만원으로 새로운 월세 계약이 성사됐습니다. 성북구 전체로 넓혀보면 올해 들어 200만원 이상으로 성사된 월세 계약은 24건에 달합니다.
강남과 용산, 성수 등 핵심 입지에서는 이미 고액 월세 시장이 공고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올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된 월세 단지는 성동구 성수동의 '아크로서울포레스트'였습니다. 이 단지 전용 159㎡는 지난 1월 보증금 5억원에 월세 2600만원이라는 기록적인 금액에 계약됐습니다.
이어 용산구 한남동의 '한남더힐' 전용 208㎡ 역시 지난 2월 보증금 5억원, 월세 2400만원에 새로운 세입자 맞았습니다. 올해 들어 서울에서 월세 1000만원을 넘긴 초고액 월세 계약은 앞선 두 거래를 포함해 21건에 이릅니다.
전세의 월세화는 지표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서울 임대차 거래 중 월세 비중은 50.5%를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전세 거래량을 추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습니다.
먼저 임대인 입장에서는 강력한 규제가 월세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정부가 전세자금반환대출을 1억원으로 제한하고 보유세 인상을 검토하는 등 이른바 '갭투자'에 대한 압박을 가하자, 집주인들이 늘어난 세금과 이자 비용을 임차인에게 월세 형태로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6·27 대출 규제 이후 서울 신축 아파트 4개 단지의 월세 비중은 평균 60%에 달했습니다. 전세자금대출 문턱이 높아지고 소유권 이전 조건부 전세대출이 금지되면서 집주인들이 전세 세입자를 받기 어려워진 영향도 큽니다.
반면 일부 임차인들의 인식 변화도 감지됩니다. 과거에는 전세를 '목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저축'으로 여겼으나, 최근 3040 세대를 중심으로 자산 운용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노원구 A 공인 중개 관계자는 "요즘 맞벌이 부부는 월세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적다"며 "보증금을 낮추는 대신 남은 목돈을 주식이나 코인 등 수익률이 높은 자산에 투자하겠다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지금의 월세화 추세를 '전세 제도의 완전한 소멸'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분석합니다. 현재의 월세 선호는 순수하게 임차인들의 선택이라기보다 각종 규제로 인한 공급 부족과 대출 차단에 따른 '비용 증가' 측면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전세 관련 규제가 완화된다면 다시 전세 비중이 반등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의견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월세를 자산 투자를 위한 기회비용으로 보느냐, 매몰 비용으로 보느냐에 따라 임차인들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월세 비중이 꾸준히 우상향한다기보다는 시장 상황에 따라 '업앤다운'을 반복하는 경향이 더 크다"며 "전세 제도와 관련한 각종 대출 규제나 세제 압박이 완화하면, 전세 공급이 다시 늘어나면서 임차인 역시 전세로 회귀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진단했다. 이어 "지금 같은 월세화 추세가 지속되어 월세가 오르면 결국 전셋값까지 함께 끌어올리는 동조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어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