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믿었다"…이미향, 9년 인고 끝에 LPGA 우승

입력 2026-03-08 20:31
수정 2026-03-09 00:16

타이거 우즈(미국)와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 등 세계 최정상급 선수가 아니라면 대다수 선수가 정점을 찍었다가 내리막길을 걸은 뒤 조용히 사라진다. 이미향(33)도 그런 일반적인 선수 중 한 명이 될 줄 알았다. 8년 8개월. 골프 선수의 커리어에서 절대 짧지 않은 침묵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드를 잃을 위기도 몇 차례나 겪었다.

그랬던 이미향이 거짓말 같은 부활을 알렸다. 8일(한국시간) 중국 하이난의 지안 레이크 블루베이GC(파72)에서 끝난 블루베이 LPGA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면서다. 그는 이날 버디 5개, 보기 2개, 더블보기 2개로 1타를 잃었으나, 최종합계 11언더파 277타로 단독 2위 장웨이웨이(중국·10언더파 278타)를 한 타 차로 제치고 리더보드 최상단 자리를 지켜냈다. 이미향은 2017년 7월 스코틀랜드 여자오픈 이후 약 9년 만에 통산 3승째를 거둬 상금 39만달러(약 5억8000만원)를 챙겼다. ◇천국과 지옥 오간 9년이미향의 골프 인생은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와 같다. 2012년 LPGA 2부인 시메트라투어(현 엡손투어)에서 신인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등장한 그는 이듬해인 2013년 정규 투어에 당당히 데뷔했다. 데뷔 2년 차이던 2014년 미즈노 클래식에서는 무려 5명이 5차 연장까지 가는 끈질긴 혈투 끝에 생애 첫 승을 따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어 2017년 스코틀랜드 여자오픈에서 극적인 역전 우승을 차지하며 통산 2승을 달성해 투어의 간판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두 번째 우승 이후 골프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미향은 2019년 메이저 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단독 준우승에 오르며 메이저 퀸의 자리를 넘보기도 했으나, 이후 깊은 부진이 찾아왔다. 샷 감각이 흔들리며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급기야 2021년과 2022년 연말에는 투어 카드를 잃고 생존을 위해 ‘지옥의 레이스’라 불리는 퀄리파잉(Q) 시리즈까지 치러야 하는 뼈아픈 시련을 겪었다.

끝없는 추락 속에서도 이미향은 무너지지 않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진 자리에서 오직 자신과의 싸움에 매진했다. 그 결과 그는 지난해 4월 포드 챔피언십에서 공동 3위를 차지하는 등 부활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세계랭킹이 300위 밖으로 밀려났고, 멘털이 완전히 소진돼 내 골프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극복했고, (포기하지 않은) 제가 자랑스러워요.” 이미향은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롤러코스터 끝 챔피언 퍼트우승 과정은 순탄하지 않은 그의 골프 여정과 닮았다. 이날 3타 차 단독 선두로 나선 그는 1번홀(파4)부터 버디를 잡아내며 기분 좋게 출발하는 듯했으나, 곧바로 롤러코스터를 탔다. 2번홀(파4) 보기를 시작으로 5번(파5)과 9번홀(파4)에서 두 차례나 더블보기를 범하는 등 전반에만 4타를 잃었다. 그사이 홈코스에서 힘을 낸 장웨이웨이가 한 타 차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변덕스러운 강풍과 기복이 심한 코스 환경, 장웨이웨이의 맹타 속에서도 이미향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후반 10번(파4)과 13번홀(파4)에서 버디를 솎아내며 장웨이웨이와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이어갔다. 하이라이트는 장웨이웨이가 공동 선두로 먼저 경기를 마친 마지막 18번홀(파5)에서 나왔다. 65m를 남겨두고 웨지로 친 세 번째 샷이 홀을 맞고 30cm 옆에 붙었다. 공이 핀 방향으로 정확히 굴러가 하마터면 샷 이글이 될 뻔했다. 탭인 버디를 넣고 우승을 확정한 이미향은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이미향의 우승으로 한국 군단은 시즌 네 번째 대회 만에 첫 승을 거뒀다. 그는 “나를 믿었다”며 “우승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됐는데 정말 기쁘다”고 덧붙였다.

서재원 기자 jw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