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 방위 목적 등을 내세워 덴마크의 준자치령 그린란드를 매입하겠다고 공언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이를 ‘21세기판 제국주의’라며 비난했다. 언론들, 특히 ‘한국’ 언론 대부분은 유럽연합(덴마크) 편을 들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습성부터 자성(自省)해야 한다.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 덴마크는 ‘중립’ 선언을 했지만 여지없이 침공당해 전투 6시간 만에 점령됐다. 망명 처지가 된 덴마크 정부는 미국에 ‘그린란드 방위 협정’을 요청, 1941년 4월 9일 체결한다. 그린란드에 군사기지를 설치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덴마크를 해방시킨 뒤 그린란드도 반환해주었다.
그린란드 국민의 약 90%는 예나 지금이나 원주민 이누이트들이다. 1950년대 덴마크는 그들에게 언어, 종교, 교육 등 총체적 ‘덴마크화 정책(Danization)’을 실시해 정체성 상실과 사회적 갈등을 양산했다. 심지어 이누이트 어린이 22명을 제대로 된 부모 동의도 없이 덴마크로 데려가 강제 문화동화 프로그램 속에 집어넣어 버렸고, 그 아이들이 그린란드로 되돌아왔을 때는 이누이트 말을 잊어버려 부모와도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 ‘실험된 아이들’은 알코올 중독, 우울증,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게 됐다. 또한 1960, 70년대 덴마크 정부는 이누이트 가임기 여성 약 4500명(당시 그린란드 가임기 여성의 50% 수준)에게 본인 동의도 없이 자궁 내 피임 기구(IUD)를 몰래(건강검진 위장 등) 삽입했다. 그녀들은 자신이 왜 불임인지도 모른 채 살아야 했고, 불임 장치가 몸 안에서 염증을 일으켜 자궁을 들어내기도 했다. 1960년대 그린란드 인구는 약 4만 명이었는데, 정상적이라면 2000년 10만 명이어야 했으나 5만6000명에 그쳤다는 견해가 있다. 덴마크가 그런 건 이누이트를 동물이나 야만인 취급해서이기도 했지만, 매년 덴마크 본토의 세금으로 그린란드에 지급되는 보조금을 줄이려 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그린란드 사람들이 트럼프를 미워한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갈등하고 있다. 국민 상당수가 미국으로의 편입, 결속을 원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완전한 독립 사이에서 경쟁 중이다. 위선하는 탄압자 덴마크의 구속에서 벗어나 세계 최강국의 보호와 경제권 안에서 번영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덴마크는 그린란드가 자원 등을 이용해 투자받고 발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차단해 왔다. 또 언론은 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저지하려 그린란드에 대군을 보낸 것처럼 보도했지만, 다 합친 병력이 고작 36명인 가운데 영국은 단 1명 파견했으며 독일군 전원 16명은 미국이 관세 협박을 하자 44시간 만에 철수했다. 그린란드 방어를 위해 개썰매 2대를 배치한 덴마크와 저들에게 트럼프는 묻는다. 너희들이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그린란드를 지킬 수 있느냐고.
트럼프는 유럽이 ‘PC 마르크시즘’에 의해 이미 죽었고, 이대로 놔두면 미국도 죽으며, 서구 문명은 물론 ‘자유주의 보편 문명’도 죽는다고 보는 듯하다. 그린란드 사태는 석기시대적 ‘제국주의’ 논쟁이 아니라 북극 전략의 문제다. 국가적 부동산 거래가 아니라 북극의 지정학적 패권 구도와 문명전쟁 속에서 읽어야 한다. 미국에 그린란드는 중국에 있어 한반도와 같다. 인류사는 전쟁사이고, 영토와 지도는 언제든 바뀌어 왔다. 목표와 처지, 적과 동지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는 ‘변화(易)’ 그 자체다. 한국인들은 이 상식을 무시하는 것에 최적화되고 말았다. 선악 구분에 집착하는 데다가, 그 선과 악이라는 것들도 각각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복잡한 국제정치의 실상과 맥락을 끝까지 파고들지 않는다. 조선 말기 위정척사파와 비슷한 세계관이 지금 이 나라의 모든 것을 장악해 주도하고 있다. 그린란드 사태는 ‘386적인 것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사회화’된 한국인들을 한탄하기 위한 가볍고 가여운 예시에 불과하다. 예컨대 베네수엘라와 이란 사태는 그린란드의 경우보다 수십 배 더 복잡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미국의 적이면 무조건 내 편이라는 식의 단순한 거짓으로 해결될 현실과 미래가 아니다. 이 ‘세계사적 격변기’에는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