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찬가…40년간의 앙코르

입력 2026-03-05 17:26
수정 2026-03-06 01:33
1983년 3월 28일 새벽 3시.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스물한 살 조수미는 차가운 공항 의자에 앉아 노트에 다섯 가지 다짐을 썼다. ‘어떤 고난도 꿋꿋이 이겨내며 약해지거나 울지 않을 것, 늘 도도하고 자신만만할 것, 어학과 노래에 온통 치중할 것, 항상 깨끗하고 자신에게 만족한 몸가짐과 환경을 지닐 것, 말과 사람을 조심하고 말과 행동을 분명히 할 것.’

신이 허락한 악기, 자신의 목소리를 믿고 써내려간 이 약속은 스스로를 향한 엄숙한 기도와도 같았다. 이후 조수미는 40년간 쉼 없이 갈고닦았다. 서울대 수석 입학 후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단숨에 두각을 나타냈다. 1986년 베르디 ‘리골레토’에서 질다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당대 최고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으로부터 “신이 내린 목소리,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는 극찬을 받으며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조수미의 위대함은 자신의 목소리를 지켜낸 영리한 선택에 있다. 카라얀이 제안한 ‘노르마’와 솔티의 ‘투란도트’ 같은 중량감 있는 배역을 “목소리가 상할 수 있고, 내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한 게 그 예다. 자신을 ‘제3의 눈’으로 냉정하게 바라보며 ‘독이 든 성배’를 마시지 않았다. 40년 넘는 긴 세월 최정상의 기량을 유지한 비결이다.


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프리마돈나의 마음은 극장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크로스오버 앨범과 드라마 OST, 월드컵 공식 음악 등을 넘나들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국가적 행사에는 주요 공연을 연기하고 달려온 게 수차례.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잘살고, 더 많이 알려져 함께 빛나야 한다”는 마음이 지금껏 그를 움직였다.

클래식의 높은 벽을 허문 그의 시선은 늘 더 낮은 곳을 향했다.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혹독한 시기에조차 그의 눈은 타인, 나아가 국가와 인류에게로 향했다. 장애인 권익과 동물 보호에 앞장서며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한 그를 유네스코는 ‘평화를 위한 예술가’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전쟁터의 여성, 난민촌의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달려간다.

조수미는 올해 세계 오페라 무대 공식 데뷔 40주년을 맞았다. 바람조차 숨죽이게 하는 청아한 고음으로 수많은 이를 울린 기적의 시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는 잔인한 말이 진리로 여겨지는 성악의 영역에서, 역설적으로 그 귀한 재능을 지키기 위해 절제와 고독을 친구 삼아온 프리마돈나.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 녹음을 위해 서울에 온 조수미를 최근 한국경제신문 본사에서 아르떼가 만났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곳이 나의 집”이라고 말하는 그는 요즘 포르투갈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평생 나의 집은 한국”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한 일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다”는 그의 나지막한 고백을 들었다. 내 인생의 노래…아직 한 곡 더 남았다
'프리마돈나' 조수미의 고백
“수경아,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다 똑같아. 왜냐면, 네가 거기 있으니까.” 조수미(본명 조수경)는 어머니가 해준 이 말을 평생 가슴에 담았다. 그가 국가를 생각하고 낮은 곳을 품을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무역업을 하며 한국의 위상을 고민한 아버지 조언호와 예술의 힘을 믿은 어머니 김말순은 조수미가 세계로 뻗어나갈 토양을 마련해준 존재다.

▷올해 데뷔 40주년입니다. 소감이 궁금합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빠른 속도에 깜짝 놀라곤 해요. 최선을 다해 살았고, 많은 일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30주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적 영광보다 음악으로 사회를 위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선 공연과 기부 등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배려하는 편이었고 동물과 자연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1983년 이탈리아로 떠나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6년 동안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죠. 그러다 브라질 빈민촌에 방문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빈민촌을 다녀온 후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 있는데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웠어요. 그때 한 인간으로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국가적 행사 때마다 앞장서 왔는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저에겐 아주 쉬운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세계적인 극장에 서도 나라가 알려져 있지 않으면 ‘한국인 조수미’로 기억되지 않더라고요. 우리나라를 빨리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에 국가적 행사가 있으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부모님께 어떤 것을 물려받았습니까. 어머니가 스파르타식으로 피아노를 가르쳐 가출한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가졌을 때 10개월 내내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로 태교를 하셨어요. 아버지는 무역업을 하며 1970년대에 외국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줄 만큼 파격적인 교육열을 갖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방안에 가두고 하루 8시간씩 피아노를 치게 하셨어요. 나중에 유학 가서 그 이유를 듣고 펑펑 울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똑똑해서 명이 짧을 거라는 말을 듣고, 점집에서 ‘뭐든지 두드려야 액운이 나간다’고 하자 부모님이 밤새 고민하다가 피아노를 빌려오신 거였어요. 딸이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피아노를 치게 하신 거죠.”

▷아티스트로서 자신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특별한 운동이나 관리보다 ‘제3의 눈’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내 몸과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멀찌감치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모니터링하는 태도가 몸에 뱄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검사해보니 스트레스 수치가 일반인의 10배인 1200이 나왔는데, 40년간 쌓인 긴장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관객은 나의 완벽한 모습만 보면 됩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제안을 거절한 일화는 여전히 놀랍습니다.

“카라얀 선생님이 저를 너무 아껴서 ‘노르마’를 같이하자고 하셨지만 제 목소리 성향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거절했습니다.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저는 제 목소리를 알았고 자존감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빠르게 구분하는 것이 롱런의 비결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대 공포증이나 징크스를 깨는 방식이 있습니까.

“이탈리아 무대에서 금기시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나간 적이 있어요. 싸늘한 관객들에게 공연 후 ‘보라색을 입었어도 당신들 행복하지 않으냐, 색은 상관없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죠. 하지만 저도 사람이라 분장실 번호를 신경 쓰거나 무대에 떨어진 굽은 못을 주워 속옷에 넣는 미신 같은 건 지킨답니다.”(웃음)

▷자신의 노래 중 대표곡을 꼽는다면.

“모차르트의 ‘밤의 여왕’은 은인 같은 곡이고, ‘리골레토’의 질다는 저의 데뷔를 상징합니다. 대중에게 선물한 ‘나 가거든’과 ‘챔피언스’도 소중하죠. 이제 제 인생엔 마지막 하나가 남았어요. 그 한 곡을 채우고 나면 음악 여정이 끝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무대에 서고 싶습니까.

“명성 있는 대형 무대도 좋지만 이제는 음악이 없는 장소에 관심이 가요. 여성 인권이 낮은 국가나 문화적 혜택을 못 받는 곳을 찾아 의미 있는 무대를 꾸리고 싶습니다. 작은 무대일수록 누군가에겐 ‘인생 공연’이 될 확률이 높거든요. 어머니 말씀처럼 제가 그곳에 있기에 모든 무대는 똑같이 소중합니다.”

▷후배 아티스트에게 해주고 싶은 말과 인간 조수미로서의 꿈은 무엇입니까.

“롱런하려면 뚜렷한 주관과 ‘남에게 주고 싶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미션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인간 조수미로서는 건강을 지켜 나라와 세계, 동물과 자연, 권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온갖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어떤 말을 해주실까요.

“우리 딸, 자존심 하나 들고 이탈리아 가서 꿋꿋하게 잘 살아냈다고, 사랑한다고 하시지 않을까요?”

김보라/허세민/조동균 기자

※조수미 데뷔 40주년 인터뷰 전문과 평론, 조수미를 있게 한 결정적 음악들, 성악가들이 바라본 조수미 일대기와 화보집은 ‘아르떼 매거진’ 4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