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한국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정부 산업정책의 틀이 바뀌어야한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특정 기업을 직접 선택해 지원하는 방식보다는 민간 금융기관에 대상을 선별할 권한을 부여하는 간접 지원이 정책 금융의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총재는 5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 2050 컨퍼런스'에 참석해 '아시아의 미래: 세계 성장의 엔진 역할은 계속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기조연설 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총재는 아시아 지역이 그간 세계 경제의 '성장 엔진'역할을 했다고 짚었다. 이 총재는 "글로벌 성장에 대한 아시아의 기여율은 1970년대 약 20%에서 현재 60%까지 크게 높아졌다"며 "제조업 기반 수출을 핵심동력으로 삼은 점이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 총재는 "10년 전만해도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지만 지금은 세계 경제가 중대한 변화 국면에 있다"고 짚었다. 탈세계화, 선진국의 제조업 자립화, 기술발전에 따른 제조업의 구조적 변화 등으로 "아시아의 고속 성장을 떠받쳐왔던 순풍이 약해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총재는 이런 상황에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선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 총재는 "한국은 정부 주도의 수출지향적 성장전략의 혜택을 가장 극적으로 누린 나라"라며 "정부가 전략적 방향을 설정해 강력히 추진하고, 대기업 중심의 민간이 구체적인 해법을 찾아가는 역할 분담이 성공의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산업정책은 더이상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 총재는 봤다. 기술 최전선에 가까워지면서 모방할 선진 모델이 없고, 특정 기업을 정부가 선택해 지원하는 방식이 비효율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최근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이른바 '한계기업' 비율이 역대 최고인 17%에 달한 것을 비효율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했다. 이 총재는 "(정부가 직접 지원 대상을 선정한 경우) 정부가 정치적 비난을 우려해 중간에 성과가 나빠도 지원을 끊기 어렵다"며 "버블을 경험한 일본과 국영기업 위주인 중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산업정책을 간접 지원 형태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이 총재는 "정부가 직접 기업을 선별하기보다 프로젝트 위험도에 따라 민간 금융과 함께 리스크를 나누고 지원 기업 선정은 민간 금융기관에 맡기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런 방식으로 산업정책이 돌아가면 "지원받는 기업은 정부 지원 사실을 모르게 되고, 성과가 나쁠 때 민간 금융기관이 자금을 회수해 정책 금융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 필요성도 거듭 강조했다. 특정 산업을 지원하는 산업정책에만 치우치지 말고, 경제 전반의 마찰을 줄이는 구조개혁을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전략 산업 육성이 미래 성장의 핵심 축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시장 유연화, 연금 개혁, 여성·고령층 경제활동 참여 확대 등과 같은 고령화 해결을 위한 구조개혁 투자도 절실한 때"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계기업 문제만 보더라도 이들의 신속한 시장 퇴출이라는 구조개혁이 뒷받침돼야 확보된 자원을 새로운 산업정책 재원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밖에 "정부가 특정 산업의 상업적 성공을 보장하기는 어려워졌다"며 "아시아 국가들은 정부 역할에 대한 기대를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조정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