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의 잔향과 에이버리의 색, 일상을 물들이다

입력 2026-03-04 15:06
수정 2026-03-04 15:07
간혹 비전공자들의 예술적 사유로 탄생한 작품이 예술가 이상의 가치와 경험을 전할 때가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 명문 바너드 칼리지(Barnard College)에서 철학을 전공한 마치 에이버리(March Avery)가 4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그려온 작품들을 보면 그렇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절제된 색채를 통해 일상적 풍경과 인물, 오브제 등에 시적 은유를 불어넣는다. 화폭에 쓰인 색들은 일상적 사유를 연주하는 악기 같다. 색의 농도와 밀도를 조절하면서 인간의 응축된 심리를 표현해낸 방식은 소박하면서도 따뜻하다.



‘미국의 마티스’라고 평가받는 밀턴 에이버리(Milton Avery)의 딸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친구인 마크 로스코, 아돌프 고틀립 등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예술적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화폭에서 미묘한 색의 층이나 명상의 순간으로 이행하는 구도자의 결이 묻어나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갤러리 에스더쉬퍼 서울은 밀턴 앤 샐리 에이버리 예술 재단(Milton & Sally Avery Arts Foundation)과 긴밀한 협업을 통해 마치 에이버리 특별전 <Form Into Color>를 열었다. 에스더쉬퍼 서울은 재단 어드바이저인 ‘와카스 와자하트(Waqas Wajahat)’와의 밀착 소통 결과물로 마치 에이버리의 미공개 작품 11점을 서울에서 세계 최초로 전시하는 성과도 얻어냈다.

이번 전시는 관객들에게 약 40년에 걸친 그의 작업 세계를 관조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해변과 바다의 이미지를 되새겨 중첩된 색으로 그려낸 <아나톨리안 코스트(Anatolian Coast, 1981)>와 여행의 사색적 시간을 표현한 <테라스 엄브렐러(Terrace Umbrella, 1990)>는 현재까지 작가가 어떤 방향으로 색을 탐색해왔는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에이버리의 시그니처 팔레트인 장밋빛 분홍색, 먼지 낀 듯한 노란색과 황토색, 코발트색이 어우러져 풍광의 원색과 형태를 응축한 작품 <로키패스(Rocky Path, 1990)>에서 관객들은 뛰어난 색채가로서의 작가를 마주할 수 있다.

원색적 실험을 더 과감하게 담아낸 <모델과 루이스(Model and Louis, 1997)>는 아버지 밀턴 에이버리와 앙리 마티스의 잔향을 불러일으킨다. 이외에도 공원에서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사나이를 오랜 시간 관찰한 끝에 완성한 <버드맨(Bird Man, 2015)>에서 작가가 일상을 대하는 따뜻한 시선도 감지할 수 있다.



전시는 마치 에이버리가 평생 일구어 놓은 색의 연구실을 엿보는 듯하다. 90세가 넘는 나이에 여전히 매일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내는 마치 에이버리가 바라본 일상은 대수롭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조용한 가정 풍경, 정물, 해변, 시골, 숲, 주변 사람 등 그가 채택한 소재도 평범하다. 하지만 이런 소재들이 가장 본질적인 색채와 형태의 요소로 축약되어 간명한 느낌을 전하는 것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평평한 구도를 만들어 일상적 은유를 자신의 색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추상적 일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그의 작품들은 따뜻한 봄 햇살과 함께 일상을 잠시 다른 차원으로 인도해 줄 것 같다.



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