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홍기·주석제…中 '국가 틀' 결정

입력 2026-03-02 17:48
수정 2026-03-03 00:35
중국 양회는 한때 ‘고무 도장’으로 불렸다. 공산당 지도부가 결정한 사안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중요성이 커졌다. 국가 통합의 상징이자 중국의 정책을 대내외에 공식화하는 창구라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양회의 시작은 1949년 9월 21일 열린 제1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다. 662명의 대표가 모여 오성홍기를 국기로, 베이징을 수도로, 의용군행진곡을 국가로 확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조직법을 통과시켰다. 주석, 부주석 등 정부의 틀이 이때 마련됐다. 그해 10월 1일 마오쩌둥이 베이징 톈안먼 망루에 올라 전 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1954년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첫 헌법을 채택하며 공산당 통치의 법적 틀이 완성됐다. 전인대는 그해 12월 ‘정협 장정(章程·법규)’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전인대와 정협이 중국 공산당의 공식 정치 기구가 됐다. 그동안 다른 시기에 열리던 정협과 전인대가 1959년부터 같은 시기에 열리면서 두 개의 정치기구가 회의를 한다는 의미에서 ‘양회(兩會)’로 불리게 됐다.

이후 양회는 국가 체제의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자리가 됐다. 1990년 홍콩 기본법, 1993년 마카오 기본법을 통과시키며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을 제도화했고, 최근에는 입법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법치 체계를 정비했다. 국가 운영의 방향과 체제를 확정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이다.

1966~197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권력 투쟁과 정치 혼란 속에 양회 기능이 사실상 중단되기도 했다. 1978년 개혁·개방과 함께 정상화된 이후 다시 정례화됐다.

최근에는 정치적 상징성이 더욱 커졌다. 2018년 전인대에서 국가주석 임기 제한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시진핑 주석의 장기 집권 체제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됐다. 당시 양회는 단순한 정책 발표 무대를 넘어 중국의 권력 구조 변화를 공식화하는 장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0년 양회 때는 논란이 된 홍콩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