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투자가들에게만 조언하는 유명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직접 추천한다기에 믿었습니다.”
대구에 거주하는 박권식 씨(70)는 최근 몇 달간 유튜브에서 본 주식 추천 방송을 믿고 총 4억원을 투자했다. 사모펀드 운용사 직원을 사칭한 조직원이 박씨에게 텔레그램으로 접근해 주식거래시스템(HTS)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고 투자금을 입금할 것을 요구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매일 5~25%의 수익이 쌓였고, 결국 원금의 10배에 달하는 수익률이 표시됐다. 하지만 이는 정교하게 조작된 가짜 프로그램이었다. 박씨는 노후 자금을 모두 잃고 앱 접속이 차단된 뒤에야 사기임을 알아챘다. 진짜 같은 AI 딥페이크·HTS
인공지능(AI) 딥페이크로 만든 가짜 투자 전문가 영상과 조작된 모바일 HTS 등을 통한 신종 피싱이 고령층을 파고들고 있다. AI 조작 영상·앱·메신저 상담 등을 묶은 ‘통합형 사기’가 확산하면서 60대 이상 피싱 피해는 최근 10년 새 최대 규모로 불어났다. 범죄 수법은 급속히 진화하고 있지만 고령층을 보호할 예방·차단 장치는 사실상 공백 상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2일 경찰에 따르면 대구경찰청 반부패·중요경제범죄수사대는 박씨의 사건을 지난달 대구강북경찰서로부터 넘겨받아 수사 중이다. 피의자들은 12개의 텔레그램 아이디만 사용하며 피해자에게 접근했지만, 현재까지 신원이 특정되지 않았다. 경찰은 조직적 범행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확대했다.
경찰은 피싱 조직이 개인투자자 사이에서 유명한 전문가의 얼굴과 음성을 AI로 합성해 종목 추천 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유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상 속 인물은 “직접 분석한 전략과 종목 리스트를 공유한다” “선착순 공개” 등 신뢰를 유도하며 자체 제작한 가짜 모바일 HTS 설치를 권유했다. 실제 거래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수익 그래프와 잔액이 늘어나는 것처럼 표시돼 피해자의 의심을 피했다.
지난해에는 ‘슈퍼개미’로 알려진 남석관 베스트인컴 대표 등을 사칭한 AI 조작 영상이 소셜미디어에 확산하기도 했다. 당시 남 대표는 “나를 사칭한 투자 영상이 퍼지며 피해 문의를 많이 받았다”며 “범죄자가 해외에 거점을 두고 있어 추적이 쉽지 않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60대 이상 피해, 9년 새 4.3배 늘어수사기관의 지속적인 경고에도 60대 이상 피싱 피해는 오히려 증가 추세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60대 이상 피해 건수는 2016년 1720건에서 2025년 7294건으로 약 4.25배로 늘었다. 전 연령대 가운데 증가 폭이 가장 크다.
전문가들은 AI 기술 발전으로 범죄 도구 제작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면서 고령층이 새로운 표적이 됐다고 분석했다. 종목 추천 영상, 상담원 프로필 사진, 수익 그래픽, 가짜 앱까지 AI로 단시간에 대량 제작·유포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코스피 지수 6000 돌파 등 최근 국내 증시 호황으로 노년층의 투자 관심이 높아진 점도 피해 확산 요인으로 꼽힌다.
텔레그램 상담 조직원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고령층과 친밀감을 형성하며 피해를 키웠다. AI로 만든 가상 인물을 프로필 사진으로 내세운 뒤 “해외여행을 다니며 여생을 보내셔도 되겠다” “나도 같은 종목에 투자해 남편 몰래 돈을 벌었다”는 식의 일상 대화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투자 성향과 자산 상황을 파악하고, 가족이나 지인과 상의하기 어려운 외로움을 파고들어 추가 입금을 유도했다.
법조계에서는 AI 기반 범죄에 대응할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이지훈 법무법인 심앤이 변호사는 “최신 AI로 제작된 가짜 영상은 디지털에 익숙한 2030 세대조차 진위를 가려내기 어렵다”며 “현재는 금융·수사기관 사칭 계좌만 긴급 동결이 가능한데, 투자 리딩방 등 AI를 활용한 신종 범죄에도 경찰이 선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법령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영리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