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는 PC방 가는데 딸은 식물인간"…빛바랜 국회 청원

입력 2026-03-02 16:41
수정 2026-03-02 17:23
"가해자는 1심 재판이 진행되는 1년 내내 자유롭게 PC방을 다니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만을 위하는 현재 법제도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는 부산으로 여행을 갔다가 동창생을 폭행해 식물인간 상태에 빠트린 20대 남성 A씨에 대해 피해자를 딸로 둔 어머니가 국회 국민 동의 청원 게시판에 올린 청원 원문의 일부다. 일관성 없는 사건 처리 기준의 개선과 피해자 참여권 강화를 촉구하는 피해자 어머니의 청원은 시민 5만1030명의 동의를 얻어 2024년 9월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다. 하지만 이 청원은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법사위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이 같은 '청원 방치'는 특정 사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청원 270건 중 90%에 달하는 243건이 법정 심사 기한을 넘긴 채 표류하고 있다. 헌법상 국민의 권리인 청원권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과 함께 근본적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문턱 낮췄다지만"…국회 청원, 심사 강제성 없어
국민의 기본권인 청원권은 제헌 헌법에서부터 규정됐다. 헌법 제26조에 근거한 국회 청원은 당초 국회의원의 소개를 받아야만 제출할 수 있는 의원소개청원 방식으로만 운영됐다. 이후 20대 국회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 직속 국회 혁신자문위원회의 권고를 바탕으로 2019년 4월 국회법이 개정됐고, 이듬해인 2020년 1월 국회청원심사규칙 개정을 통해 온라인 기반의 전자청원(국민동의 청원) 제도가 본격 도입됐다. 청원 참여자가 5만명을 넘기면 국회 소관 상임위 자동 회부 기준을 충족한다.

그러나 당초 취지인 민생 입법과 관련해 국회 청원 제도는 사실상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온라인을 통해 청원의 문턱은 크게 낮아졌지만, 실질적인 심사로 이어지는 고리는 여전히 끊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한을 넘겨도 강제성이나 처벌 규정이 전무하다 보니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안건 상정을 무기한 미루는 행태가 관행처럼 굳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국회법 제125조 5항은 청원이 회부된 날로부터 90일 이내에 심사 결과를 보고하고,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60일 범위에서 한 차례만 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취사선택' 당한 민생…"청원 심사 의무화 시급"
이 같은 구조적 맹점의 결과는 수치로 나타났다. 국회 청원 건수는 16대 국회(765건)에서 정점을 찍은 이후 꾸준히 감소했고, 폐기율은 높아졌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회 청원 건수는 17대 국회에서 432건으로 급감한 뒤 18대(272건), 19대(227건), 20대(207건), 21대(194건)로 대수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었다. 반면 심의조차 받지 못하고 폐기되는 비율은 날로 높아졌다. 16대 국회 당시 55.7%(426건)였던 임기만료 폐기율은 17대에서 73.1%로 치솟은 후 꾸준히 상승했다. 특히 21대 국회는 전체 194건 중 161건(83.0%)이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되며 역대 최고 폐기율을 기록했다. 이 기간 본회의를 통과해 채택된 청원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감소세를 보이던 청원 건수는 개원 후 22개월이 된 22대 국회 들어 279건으로 급증했다. 다만 이는 민생 법안이나 정책 제안보다는 정치 청원이 집중된 결과로 풀이된다. 22대 국회 청원 중 정당 및 특정 인물과 관련된 사안이 5분의 1 수준(50건)으로 집계됐다. 이외에도 '대통령실 인사검증', '대통령 재판중지법' 등 정쟁적 청원이 20건, 부정선거 관련 청원이 18건 접수됐다.

학계에서는 정치권의 '청원 취사선택'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일례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2024년 전체회의를 열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 촉구 국민청원과 관련한 청문회를 열었다. 반면 '불법 성착취물 공유 사이트 형량·벌금 강화 청원' 등 민생 청원은 법사위 회부 이후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박상철 경기대 정치대학원 교수는 현재의 청원 제도를 두고 "국민의 입법 의견을 듣는 문은 열어놨으나, 실제 입법 과정으로 연결되는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라며 "국민청원은 국가기관에 직접 전달된 국민의 목소리인 만큼 안건이 유지되고 논의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청원 심사의 제도적 의무화'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 교수는 "현재는 제도가 권고 사항 수준에 머물러 있어 입법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동의 수치가 높을수록 국회가 반드시 응답하도록 심사 의무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우 한경닷컴 기자 krse905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