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비자금 조성은 대표 의무 위반 여지…KT 경영진 배상 책임 다시 가려야"

입력 2026-03-02 09:06
수정 2026-03-02 09:50


'상품권 깡'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국회의원들에게 이른바 '쪼개기 후원'을 한 혐의와 관련해, 황창규 전 회장과 구현모 전 대표 등 KT 전직 경영진들의 손해배상 책임을 다시 가려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박모씨 등 KT 소액주주 35명이 이석채·황창규 전 회장과 구 전 대표 등 전·현직 임원 13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수원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했다고 2일 밝혔다.

이번 사건은 2019년 3월 KT 소액주주들이 경영진의 임무 해태 등으로 회사가 입은 손해를 배상하라며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이다. 원고들은 △무궁화위성 3호 해외 매각 △미르재단 11억 원 출연 △아현국사 화재 및 통신시설 등급 변경 △CR(대외협력) 부문 임직원들의 부외자금 조성 및 불법 정치자금 송금 등을 문제 삼았다.

이 중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하고 경영진의 책임 여지를 인정한 쟁점은 '비자금 조성 및 정치자금 송금' 부분이다. 앞서 KT 임원들은 2014년 5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대량 구매한 뒤 되팔아 현금화하는 방식으로 비자금 11억 5000만원을 조성했다. 이 중 4억 3000만원을 국회의원 111명에게 불법 후원한 것으로 조사됐다. 구 전 대표 역시 이 과정에 관여해 별도의 형사재판에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유죄가 확정된 바 있다.

앞서 1심과 2심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 황 전 회장의 법령 위반이나 임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구 전 대표에 대해서는 직접 관여한 기간 동안 임무를 게을리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해당 금액이 반환되어 회사의 손해가 전보됐다는 이유 등으로 배상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비자금 조성은 그 자체로 KT와의 위임계약에 따른 임무 위반으로서 채무불이행에 해당한다"며 "황 전 회장은 대표이사로서 부외자금이 조성된 날부터, 구 전 대표는 그 후 이사로 선임된 시점부터 각 조성이 종료된 날까지 감시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시했다.

특히 대법원은 이들의 감시의무 위반에 따른 '손해의 범위'를 원심보다 넓게 판단했다. 재판부는 "송금된 부분만을 손해라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은 찾아볼 수 없다"며 "그 의무 위반 등 행위와 KT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제재로 추징금 및 과징금을 납부함으로써 입은 손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반환된 정치자금 외에도 비자금 조성 파장으로 회사가 물어낸 막대한 과징금 등에 대해서도 책임을 따져봐야 한다는 취지다.

한편, 대법원은 원고들이 함께 청구한 무궁화위성 3호 매각, 미르재단 출연, 아현국사 화재 쟁점에 대해서는 피고들이 법령을 위반하거나 임무를 방치한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본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정희원 기자 tophee@hankyung.com